청제국(淸帝國)이 조선을 정벌했더라면

금제국 건국하고 도성에 단군묘를 세우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
편집부 | 입력 : 2008/03/01 [19:29]
이 글은 아래 본문에 애신각라 부의 (愛新覺羅 傅儀) 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어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진명서구(homj66)" 네티즌의 글을 옮겨 싣는다.[편집자 주]
 
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다.

판사가 젊은이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젊은이는 대답한다.
" 애신각라 부의 (愛新覺羅 傅儀) "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모택동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한족(漢族)인 판사가 듣기엔 이상하기만 했던
청나라 황제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약 애신각라에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면...
 
[애신각라 (愛新覺羅) 의 비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라는 중국의 억지가
10년만의 폭염으로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한국의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부흥했던
나라는 모두 중국의 지방 정권일 뿐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토록 가볍다.
그러나 섬뜩하게 위험하다.

섬뜩하게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노리는 것이 단지
고구려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강역은 상당 부분 한반도 북부와 동북아시아로 고구려와 비슷하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면 고조선도 중국사인 것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박탈당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신라 건국 이후 2천년으로, 강역은 한강 이남으로 좁혀질 것이다.

심지어 중국의 현재 논리를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백제도 한국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는 중국인이라는, 고구려 시조
추모(주몽)왕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청나라를-엄격히 말하면 후금(후금은 청나라의 전신이다)-
세운 사람은 누루하치. 그런데 그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이 신기한 조합의 한자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 는 의미라고 한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의 근원을 살펴 보면 신라와 관련된
성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진다.
 
[금나라의 금(金)은 신라왕실의 성씨인 김(金) ]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라와, 신라 왕족의 성 인
금(金)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역사연구단체 한배달의 오정윤 연구원은 먼저 청나라가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긴 예를 들었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우리 시조는 신라인" ]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
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고 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 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 라고 주장한다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 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원제목 : 청나라가 조선을 정벌했었더라면
글쓴이 : 네티즌 민족파

이명박 행정부에서 나서서 영어를 전국민에게 강요하는 것만이 세계화의 길이다라고 강요한다. 민족정기를 잃어버리고 이제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자들, 길게 잡아도 유대인의 언어, 넓게 범위를 잡아도 앵글로족, 브리튼족의 언어에 불과한 영어를 국어화하려고 사대매국적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분위기와 여론을 조성하고 충동질을 해대고 있다.

충동질에 넘어간다라고 하는 것도 것이겠거니와 해마다 영어사교육비로 퍼붓는 돈은 자그만치 2백억이 넘는다. 대략 드러나고 밝혀진 것만 2백억이겠다지만 눈에 들어나지 않은 것까지 종합한다면 2백억의 수배는 더되고도 남을 것이다. 해외로 언어연수, 조기유학 등 간다라고 하면서 외국에다가 쏟아붓는 돈은 또 얼마이던가.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면 민족의 정체성마저 잃고 타민족에 흡수되거나 동화되기에 마련이다. 
 



그런데 과학적 우수성이 입증된 한글을 버리고 양키와 앵글로족, 바다해적의 언어를 국어로 사용하려고 위에서부터 충동질을 하고 있다. 정치적, 군사적 노예, 문화적 노예로 부족해 이제는 언어적 사회적 노예까지 자청하겠다는 것인가.

청나라가 조선을 콱 정벌해버렸었더라면, 청나라 누르하지(1559 ~ 1626. 9. 30)나 황태극(1591. 11. 28 ~ 1643. 9. 21)이 중원을 원정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서 조선을 정벌하였다더라면... 누르하치나 황태극이 말머리를 돌렸었더라면 우리는 일제침략기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영토는 다시 단군조선, 고구려의 강역(한반도와 만주 모두를 포괄했던)을 다시 수복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절실하다.

청나라가 차라리 조선을 쳤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렇게 말하면 나를 일제시대를 찬양한 수구냉전파 지 아무개와 대학교수 한 아무개, 뉴라이트의 이 모 교수와 같은 줄로 놓을지는 모르나 일본과 만주족은 차원이 다르다.

철저하게 언어가 다른 이민족으로 변화한 일본, 단군조선과 변한의 도래인(일본 원주민 아이누들이 말하는 고깔족, 현 일본인의 주류의 선조로 기마민족)과 뒤에 백제와 고구려계 유민들이 일부 모여서 이룩한 나라가 일본이나 일본은 자신들의 근본을 잊고 산다. 그러나 만주족은 중국에 흡수되기 전까지만 해도 만주족, 여진족에게는 단군과 신라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이 있었고, 그들과는 통역 없어도 언어가 통하고 설·단오·추석·동지 등 우리와 같은 명절전통과 풍속을 갖고 있었다.

통역 없이도 언어대화가 가능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다른 민족이거나 전혀 관련이 없는 종족끼리 가능한 것인가?

청나라가 중국을 정벌하던 시기(1636~1664)의 조선은 이미 이때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합리적 중립외교와 부국강병을 추진하던 광해군과 임진왜란때 의병봉기 주도층인 북인이 몰락하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쿠테타를 일으켜 정적을 학살한 인조가 집권하고 중화 사대모화주의적 지식인인 사림파 서인들이 활개를 치던 시대였다. 차라리 청나라가 중국대신 조선을 콱 정벌해버리는 편이 우리민족의 민족사적 입장에서는 나았을 것이다. 만주족도 단군과 신라를 조상으로 받드는 민족이었다.

여진족과 만주족은 같은 민족으로 우리 조상들은 말갈, 물길 등으로도 불렀다. 여진족은 모두 동이족, 쥬신족의 일파였다. 그들이 모두 고조선의 성조 왕검단군을 그들의 국조로 받들던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후손들로 부여, 고구려, 대진국(중국명 발해)에 예속되거나 고려를 형님의 나라로 받들고 공물을 보내왔다.

부여가 고구려 태조대왕 고궁의 침입을 받자 부여왕의 종제가 1만호를 이끌고 귀순하였는데 남은 무리들 중에는 숙신족(말갈족의 선조)에게 귀순하는 이들도 있었다.

부여가 장수왕에 의해 망하자 끝까지 결사항전하던 이들은 말갈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말갈도 곧 고구려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후 말갈족은 고구려족과 연합하여 후고구려 대진국(발해)(668~926)을 세운다. 대진국이 거란족의 요(僚)나라에 의해 패망하자 말갈족은 제부족 형태로 흩어져 있다가, 1133년 완안족의 추장 김아골타를 칸(한)으로 받들고 금제국을 건국한다.

금제국을 건국한 아골타는 여진의 핏줄이나, 신라의 핏줄이기도 했다. 김준의 9대손으로 신라 경순왕의 11대손이 된다. 김준은 김극수,김함보 등의 다른 이름도 있는데 그는 경순왕의 아들 김일의 아들이었다.

아골타는 금제국을 건국하자 도성인 상경임황부에 단군묘를 세우고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금사(金史)와 조선상고사(신채호), 몽배금태조(박은식), 규원사화(북애자) 등에 기록된 내용이다.

고조선 멸망후 독자적으로 분리된 숙신족에게도 단군의 자손이라는 의식이 존재했다. 그들이 종주로 받들던 고구려와 부여가 조상신으로 추모해오던 단군이니 부여와 고구려의 형제 숙신-여진족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국조로 떠받들었던 것이고, 신라도 흉노족의 일파가 세웠으나 피지배층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유민들의 자손이었다.

임황부에 단군묘를 세운 아골타는 성조 단군왕검을 개천홍성제로 추숭하고 시조신으로 받들었다. 해마다 10월 3일이면 개천홍성제묘에 친히 제사를 주관하였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는 다시 아골타의 16대손이라는데 일설에 의하면 외손인 듯하다. 명말청초의 동요중 주씨네 떡 빵가루로 이씨가 빵을 지으니 조서방이 차지해 먹더라 라는 내용의 속요가 쥐나족 백성들 사이에 전파되었는데 주씨네는 명나라의 황실(주원장 일가)를 말하는 것이고 이씨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삼번의 반란의 주동자 이자성을, 조서방은 누르하치를 각각 말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가 애신각라(신라를 사랑하고 뼈에 새기겠다)라고 성을 쓰기 전에는 조씨성을 사용했다고 추정되는 것이다.

여진족, 만주족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조선인들과 대화를 할 때 통역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다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청나라때까지 전해지던 쥬신족의 강렬한 기상을 잃고 중국 지나족에 예속되어 식민화되었으나 신라인의 후손을 받아들여 왕으로 삼은 것이나 단군숭배와 신라를 뼈속 깊이 새기겠다는 것은 그들이 한민족, 우리와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이 아니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다물의 자손답게 넓은 벌판으로 무한대로 뻗어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중원의 넓은 벌판과 한도 끝도 없이 보이던 모래더미에 욕심을 내어 중원을 정벌하였다. 그 중원의 밀림 속에 각지의 약소민족을 집어삼키는 민족 블랙홀 지나족이 숨어있다는 것은 망각한채 말이다.

그들이 동이족, 쥬신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들이(아골타와 누르하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단군과 신라의 자손임을 영원히 잊지않고 쥐나족의 상스러운 문화따위에 동경심을 가지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은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지는 불행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 공용화가 유행하고 있다. 거친 세계화의 풍랑, 세계화라는 가면을 쓴 제국주의자들의 마수에 이제는 한글의 가갸거겨를 깨우치지 못한 아기들에게 조차도 영어가 무차별 주입식으로 암기, 세뇌를 강요당하고 있다.

세계화도 좋고 영어 공용화도 좋지만 한글을 지켜야 한다. 문자와 언어를 지켜야 한다. 아무리 영어 공용화가 소중하고 중요하다라고 하더라도 민족의 정체성은 지켜야 한다. 우리가 어느 민족이고, 우리가 누구고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뿌리·주체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어떤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의 형제 만주·여진족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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