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

동북공정은 만주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중국 나름의 정치적 포석
윤내현 교수 | 입력 : 2008/03/31 [00:29]

1.고구려는 한국사에 포함될 수 있는가?
 
중국은 고구려사가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연구결과이다. 이 사업은 “동북공정”이라는 약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彊歷史與現象系列硏究工程)이다.중국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많은 연구결과를 축적하여 놓았으므로 굳이 한국의 움직임에 반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북공정은 그 명칭이 보여 주듯이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는 학술사업일 뿐만 아니라 동북지역 즉 만주와 한반도의 매래에 대한 중국 나름의 정치적 포석이기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고구려 역사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중국은 만주와 그 지역 거주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연고권을 역사를 통해 확고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그러한 중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이 만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고구려가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고구려는 오늘날 중국의 영토인 만주에서 건국되었으며 대부분의 기간 그중심부인 도읍은 만주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동북 변방에 있었던 소수민족의 정권이며, 둘째는 한민족은 그 활동영역이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한 고구려인들이 한민족에 포함될 수는 없으며 셋째는 고구려는 서한 무제가 설치한 중국의 행정구역인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에서 건국된 나라임으로 중국을 계승한 나라이다. 이 외에도 조공과 책봉 등 몇 가지를 더 들고 있지만 이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구려는 한민족의 영역인 한반도 밖의 만주에서 건국되었고 그 중심부도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은 한민족이 아니며 고구려는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중국역사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불행하게도 한국의 고대사 체계는 이러한 중국인들의 주장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지난날 한국 학계통설을 따르면 한민족은 한반도와 만주를 통합한 적이 없다. 

고구리를 건국한 고추모와 어머니 유화(해모수의 손자 고모수가 아버지)

 

그리고 한국사개설서에는 고구려는 현도군 지역에서 건국되었다고 서술되어있다. 근래에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국한해서 보는 견해가 지난날 우리 학계의 통설이었고 지금도그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고조선의 영토가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만주의 거주민을 한민족에 포함시킬 근거가없다. 민족은 지역을 단위로 한 정치공동체, 문화 공동체로서 일정한 지역의 거주민이 자신들이 구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집단귀속의식을 가짐으로써 형성되는 것인데 한반도와 만주가 하나로 통합된 적이 없다면 만주 지역 거주민이 한민족에 속한다는 집단귀속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따라서 고구려가 한민족의 나라라는 분명한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고구려 건국 이전에 한반도와 만주는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이루어 그거주민은 이미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민족을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고구려는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이 건국한 단국조선을 계승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고대사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한다.



2.한국 고대사 체계에 문제가 있다
 
한국고대사 체계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방치해놓고 있다. 현재 통용되는 우리의 고대사 체계를 보자.오늘날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고대사 처계가 고조선ㅡ>준왕ㅡ>위만조선>한사군>ㅡ>여러나라ㅡ>삼국시대ㅡ>남북국시대 등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개설서들은 삼국시대부터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그 이전 고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여러나라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는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그 이전의 역사는 불확실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신화시대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그런데 고조선의 준왕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사료에 의하면 그는 중국 망명객인 기자의 후손이다 중국 혈통인 것이다.
 
한민족이 세운 단군조선이 어떤 연유로 중국 망명객의 후손에게 정권이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준왕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왕을 한민족의 혈통으로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준왕 다음에 등장하는 위만도 중국의 망명객이다. 중국의 서한 초에 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은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했다고 위략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 학계에는 위만은 중국에 거주하던 조선계통 사람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분명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를 중국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위만조선 다음에 등장하는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다. 서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네 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이다. 한국사 개설서에는 임진강 유역까지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위만조선의 뒤를 이어 여러나라가 등장한다. 그들이 위치한 지역은 대체로 북만주에 부여, 연해주에 읍루, 남만주와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 함경도에 동옥저, 강원도에 동예, 한반도 남부에 삼한 등으로 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한반도 남쪽에서 고대사 체계를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단군조선은 어떤 연유로 중국 망명객 기자의 후손인 준왕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을까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는 아닐까 실제로 이었다 해도 그것을 국가 수준의 사회로 볼 수 있을까.둘째, 준왕은 중국 혈통 인물이고 위만은 중국 망명객이며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었다면 단군조선이 끝난 후 한민족은 중국인들의 지배를 받다가 중국에 통합되었다는 것이 된다. 만약 단군조선의 존재가 의심스럽다면 한국사는 중국인들의 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셋째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에서 한사군의 뒤를 이어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가 일어났다면 중국인들의 시각에서는 그 나라는 중국을 계승한 나라로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만약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 했더라도 좁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정치집단이었다면 한민족은 이 시기까지도 민족을 형성했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중국인들은 지금 이러한 논리로 만주와 연해주에 있었던 부여 고구려, 읍루, 발해 등은 한국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통용 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중국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준왕의 정권이나 위만조선 및 한사군은 한국사의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위치했던 지역은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다. 이들의 흥망성쇠는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요동과 한반도 지역에는 단군조선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가 중앙 권력의 약화로 지방의 정치세력들이 독립하여 부여, 읍루 고구려, 최씨낙랑, 동옥저 동예 삼한 등의 나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는 한민족이 세운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서 한민족의 국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사 개설서들은 이를 바로잡지 않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한민족은 주군을 빼앗아 중국계통 사람의 지배를 받거나 한만족의 영토가 중국에 통합된 적이 없는 것이다. 기자일족의 망명 위만조선의 건국 한사군 설치 등으로 인하여 단군조선 영토의 서부 변경에 다소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 고대서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여러나라를 거쳐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 등으로 끊어짐 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단군조선 말기에 서부 변경인 난하(灤河) 유역에서는 몇 차례의 정변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에서 망명 온 기자 일족에 의한 정권 수립,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에 의한 위만조선의 건국,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漢四郡)의 설치 등이다.서기 전 1100년경에는 기자 일족이 고조선의 서부변경으로 망명해 왔다. 기자는 원래중국 상(商)왕실의 후예로서 기(箕)라는 땅에 봉해졌던 자(子)라는 작위를 가진 제후였다. 그런데 상나라가 주족(周族)에 의해 멸망되자 기자는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난하유역에 정착하였다. 기자일족은 망명정권을 세우고 고조선의 거수국이 되었다그 후 서한 초인 서기 전 195년에는 위만이 서한에서 기자국으로 망명해 왔다.
 
위만은 준왕에게 국경 지대에 살면서 서한의 침략을 방어하겠다고 하므로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博士)로 삼아 국경인 난하 유역에 살도록 하였다. 위만은 그곳에서 토착인들과 주국 망명인들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서한이 쳐들어오니 궁궐을 지키겠다고 거짓 보고를 하고는 무리를 이끌고 들어가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웠다.준왕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은 서한에 외신(外臣)이 되겠다고 약속하고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당시 서한은 건국 초로서 국력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였으므로 위만을 이용하여 고조선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철기가 보급된 이후 종래의 경제구조와 사회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위만은 그 세력을 지금의 대릉하(大凌河)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동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서한은 무제 때에 이르러 국력이 강성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위만을 이용하여 고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서한 무제는 서기 전 108년에 위만조선은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지역에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등의 세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여세를 몰아 고조선 영토를 침략하여 지금의 요하(潦河)까지 차지한 후 앞의 세 군보다 1년 늦게 서기 전 107년에 요하 서부유역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이렇게 설치된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한사군은 서기 전 82년에 진번과 임둔은 폐지되고 낙랑과 현도 두 개의 군만 남았다가 현도군은 오래지 않아 서기 전 75년에 고구려와 토착세력의 공격을 받아 난하 상류유역으로 이동하였고, 서기 106년에는 요동군(潦東郡)지역으로 이동하여 그 명칭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서기 206년에는 그 지역을 지배하던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나 서기전 313~31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낙랑군, 대방군, 현도성 등이 모두 격파되어 한사군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난하 유역까지를 차지함으로써 고조선의 고토를 완전히 수복하였다.기자국, 위만조선, 한사군은 서로 연결된 사건으로서 지금의 난하 유역을 기점으로 하여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이 기간에도 고조선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 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 개설서들은 기자의 후손인 준왕을 고조선의 왕으로 서술함으로써 위만이 고조선의 정권을 빼앗았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위만의 정권 수립과 동시에 고조선은 멸망하였고 중국세력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고조선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3.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단군조선은 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국가였다. 『시경(詩經)』 「한혁(韓奕)」 편과 『제왕운기』는 고조선은 많은 소국(거수국(渠帥國)을 거느린 국가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고대국가가 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고조선이 건국되기 전 각 지역에는 마을연맹체들이 있었고 이들은 종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이 건국된 후 이들은 고조선의 지역 정치집단으로서 거수국이라 불리어졌고 그 우두머리를 거수(渠帥)라 하였다. 거수국은 대부분은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각 지역에 있었던 마을연맹체들이 성장한 것이었지만 고조선이 건국된 후 필요에 따라 새로 건설된 것도 있었다.당시에는 통치조직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중앙에서 모든 백성을 직접 지배하지 못하고 각 지역 마을연맹체의 우두머리를 거수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봉지를 다스리도록 하고 중앙의 단군은 거수들만을 다스렸다.
 
따라서 거수들 사이는 신분이 대등하였으나 모두가 단군을 그들 공동의 통치자로 받들면서 명령에 복종하고 동일한 법을 따르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일정한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에는 고조선과 동시대에 고조선의 영토 안에 위치했던 작은 나라 또는 종족들의 명칭이 보인다. 이들은 고조선에 속해 있던 거수국이었던 것이다. 같은 지역에 독립국이 겹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들면 부여(夫餘), 고죽(孤竹), 고구려(高句麗), 예(濊), 맥(貊), 추(追), 기자국(箕子國), 진번(眞番),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 숙신(肅愼), 청구(靑丘), 양이(良夷), 양주(楊洲), 발(發), 유(兪), 옥저(沃沮), 진(辰), 비류(沸流), 행인(荇人), 개마(蓋馬), 구다(句茶), 조나(藻那), 주나(侏那), 한(韓, 三韓) 등이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에 속해 있던 거수국 가운데 하나였다.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거수국이 많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을 것이다.서기 전 1세기에 한반도와 만주에는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북만주 지역에 동부여가 있었고 그 동쪽 연해주 지역에 읍루, 평안북도와 지금의 요동을 포함한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 함경남북도 지역에 동옥저, 강원도 지역에 동예, 대동강 유역에 최씨낙랑, 한반도남부에 한(삼한) 등이 그것이다.
 
한은 신라, 백제, 가야 등이다. 동부여는 서기 전 59년 고구려는 서기 전 37년, 신라는 서기 전 57년, 백제는 서기 전 18년 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찍이 건국된 동부여, 고구려, 신라는 모두 건국 연대가 서기 전 1세기 중엽이다. 이 나라들이 독립했다는 것은 이 시기에 한반도와 만주를 그 영토로 아우르고 있던 단군조선이 붕괴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 여러 나라는 모두 단군조선 영토 안에서 건국되었음도 알게 해준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인 것이다. 고구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지만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종족 즉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중앙통치력을 잃게 되자 독립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에서 성장한 나라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태어난 한민족의 국가인 것이다. 

식민사관과 싸우며 민족사학정립에 헌신한 윤내현 교수


[동영상1]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 체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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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국 고대사 체계 바꿔야 한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크게 잘못되어 있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중국 기자의 후손인 준왕과 중국 망명객인 위만이 한민족을 통치했고 위만조선의 뒤를 이어 서한의 행정구역인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이 설치됨으로써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부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한(삼한) 등이 건국되었는데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 지역에서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사 체계가 옳다면 고대에 한민족은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고구려도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음으로 중국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펼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의 고대 문헌에 의하면 이러한 한국 고대사 체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준왕 정권과 위만조선 및 한사국은 한국사의 주류가 아니었다.고구려가 한국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사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고구려가 건국된 요동지역이 고구려보다 앞선 단군조선시대에 이미 한민족의 영토에 속해 있어야 한다. 즉 단군조선의 강역이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그래야만 만주와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하나의 국가에 속하여 동일한 정치공동체,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고 집단귀속의식을 갖게 되어 이 지역 거주민 모두가 한민족이 되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는 단군조선이 붕괴되면서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여야 한다. 그래야만 고구려는 한민족의 국가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고대 문헌은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해준다. 단군조선은 북경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를 서쪽 경계로 하여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그 영토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서 서부 난하 유역에 기자국(준왕정권)이 서고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이 위만조선을 건국하여 그 영토를 대릉하까지 확장함에 따라 단군조선의 서부 영토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다시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하 유역까지 차지하여 난하와 요하 사이에 한사군을 설치함에 따라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은 지금의 요하가 되었다.요약하면 기자국(기자국),위만조선, 한사군 등은 지금의 요서 지역 즉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교체되는 기간에도 단군조선은 서쪽 국경에 변화가 일어났을 뿐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를 그 영토로 삼고 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단군조선의 여러 거수국 가운데 하나였는데 단군조선 말기에 중앙의 통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구려와 부여, 발해 등 만주에 있었던 나라들은 중국변방사이고 한국사에 포함 될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주장은 계속될 것이다.

윤내현 교수/약력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 역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 연구회 회장



[자료]
고구려(고리.구리)의 어원은 ‘골’

900년의 역사 고구려는 단군조선 제후국 ‘고리’에서 출발한다

어느 나라든 그 나라마다 역사와 전통이 있다. 미국과 같이 역사가 짧은 나라는 국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오르지 헐리우드식 영웅전을 통하여 애국을 호소하고 있다. 반면 중공(중국)같이 이합집산이 심한 나라는 남의 나라 역사마저 자기 것으로 병합하려하는 무모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나라의 분열을 방지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들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만년의 방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이전의 역사를 뚝 잘라내어 신화로 만들어버린 어리석음을 전혀 고치려 하고 있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먼 옛날 천혜의 땅 흰머리산(히말라야, 실제의 백두산)에서 밝달호수(바이칼) 사이의 드넓은 땅에서 번영의 시대를 구가하던 우리 구리족(한민족)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소빙하기와 내부 분열로 인하여 세갈래로 흩어져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 부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와 만주벌에서 몽골벌에 이르는 대평원에 정착하였고 두번째 부류는 남미 북미를 아우르는 아메리카 전 대륙이고 세번째는 헝가리와 터키 그리고 터키메티스탄 라인인 것이다.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선 구리족의 어원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 민족을 뜻하는 동이(東夷)는 구이(九夷)가 원래의 한자말로 나중에 지나(옛날 중국 진나라, china)인이 우리를 얒잡게 말하면서 구자를 방향을 뜻하는 동(東)으로 바꾸어 붙였고 또다시 이(夷)자 마저 오랭캐라는 뜻으로 바꿔 부르게 한 것이다.(우리나라 한자사전의 변경을 강력히 요구한다.)

한자는 단순히 음을 달기 위해서 사용한 면도 있고 그 음을 빌려 쓰기 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우선 파자(한자의 분해)를 통하여 그 뜻을 유추해 보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夷는 弓+大가 아니고 정확하게는 十 + 人 + 弓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十은 열십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뜻하며 弓은 활이 아니라 윗쪽의 하늘과 아랫쪽의 사람을 이어줌을 뜻한다. 종합하면 하늘과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라는 뜻, 또는 향불을 피워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라는 숭고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민족을 뜻하는 또 다른 말 하늘족(한민족)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하늘을 숭배해 왔다. 하늘에 제사지내고 항상 하늘에 감사하며 살아온 것이다. 예를 모르는 미개인인 지나족이 볼때는 경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옛 지나땅에 유교를 전파한 공자도 동이를 흠모하며 그들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지나의 일부 식자들은 우리민족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참고로 우리의 역사책이 아닌 중국의 역사책을 보면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서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夷는 곧 뿌리이며 어질게 산다고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 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道로써 다스리며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인 것이다.라 하고 있다. 또한 사마천(史記)에서는 은나라의 건국시조 설은 동이족이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고사변에서는 중국 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라고 할 정도로 우리민족을 숭상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민족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인내천)을 제일 중요한 삼대요소로 삼고 있다.

다시 하늘과 달리 땅의 개념인 구이(九夷)에 대하여 알아보자. 구이는 발음 자체를 한자음으로 옮긴것으로 실제 어원은 구리이다. 구이의 이자는 리와 동음으로 실제로는 구리라고 발음해야 하는 것이다.

구리는 무엇인가? 이것은 다시 굴 또는 골로 해석될 수 있다. 골이라는 것은 땅과 땅 사이에 생긴 골짜기를 뜻하며 동시에 땅을 경작하는 골파기로 만들어진 골로 해석할 수 있다.

옛부터 사람살기 좋은 터는 십승지라고도 하는 높은 산 안쪽의 양지바른 골짜기이다. 그래서 지금도 안골, 뒷골, 황골등과 같은 마을이름이 쓰이는 것이다.

골의 또다른 의미는 밭갈기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살이에 가장 중요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밭갈기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시작하여 구리족이 된것이다.

구리는 옛부터 근래까지 계속 이어져 나라이름으로 쓰여지고 있다. 고려는 구리가 변하여 (고)구려가 되고 나중엔 고려로 이어져 유럽으로 넘어가 꼬레아(corea-korea)로 변해 다시 역수입된 것이다.

옛날의 말갈 돌궐족의 갈과 궐도 같은 의미이며 몽골의 골 또한 같은 의미이다. 유럽에 있는 형제국인 터키와 헝가리도 같은 의미이다. 터키는 돌궐의 다른 이름인 투르크가 변하여 터키가 되었고 헝가리(hungary)는 훈갈의 유럽식 발음으로서 실제로도 헝가리에서는 훈의 땅이라는 의미로 부른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하나 더 얘기하자면, 구리족에 대한 또다른 의미로는 청동의 최대원료인 구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선사시대에 땅을 경작하여 곡식을 걷어들였다면 청동기시대에는 땅에 있는 돌을 제련하여 구리를 만들어 창과 칼 또는 여러가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것은 엄청난 발명으로서 구리족이라는 별칭이 붙여질만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던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동이족이 아닌 쇠를 의미하는 동철족이라고 부르자고 하는 것은 이에 맞지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설’은 은나라의 시조로 그의 14대손인 탕왕이 은나라를 건국하였다.

공자는 은나라의 후손으로 은나라가 망한 후 주나라가 세워지자 그의 선대들은 7대 동안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0대손인 공자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다. "장백산에서 날아온 학이 곤륜산에서 노닐던 암사슴과 만나, 그 사이에서 나온 사람이 공자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장백산은 백두산이고 곤륜산은 중국을 상징하는 산이므로 결국은 공자님의 아버지는 동이족이고 어머니는 중국의 한족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자신이 주나라에 있음을 그런 말로 변명하면서 아버지의 나라의 혈통을 잇는 동이국을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자료]환단고기가 증명하는 한민족사

 

1. 북진한北眞韓

47대 2096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단군조선[bce2333~bce238]은 삼한관경제로 나라를 다스렸으니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이다. 삼한이란 “삼신의 광명이 비추는 땅”이란 뜻이니, 마한은 천일天一, 번한은 지일地一, 진한은 태일太一을 상징한다.

환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의 첫 수도는 아사달이니 지금의 하얼삔으로 만주, 내몽골, 시베리아 일대가 그 관경이며, 번한의 첫 수도는 오덕지니 옛 험독에 있는 왕검성으로, 지금의 개평부 동북 칠십리에 있는 탕지보이다. 그 관할하는 영역은 요동, 요중, 요서, 하북, 산동지방을 비롯한 중국 동부 일대가 그 관경이며, 마한의 첫 수도는 백아강이니 지금의 대동강에 있는 평양으로 한반도와 대마도, 일본 구주 일대가 그 관경이다.

진한은 대단군이 직접 통치를 했고, 마한과 번한은 부단군을 두어 대리 통치를 했으니, 진한의 대단군이라야 말로 참된 주인主人이 된다.

일설에 의하면 진한의 주인인 진주眞主 의식은 세속의 노름판에도 전수되고 있다고 한다. 한양조선의 대표적인 노름으로 가구판 노름이 있는데 갑오甲午를 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이 갑오를 다른 말로 진주라고 불렀으니, 갑오는 오행五行의 수로는 3과 7로 합하면 10이다. 3이란 삼신三神을 뜻하며 7이란 칠성七星을 뜻하니 그 합한 수 10은 우주를 주재하는 절대자 상제님上帝任을 뜻한다. 갑오甲午는 가장 크게 용사하는 황극皇極을 뜻하고, 그 황극의 본원은 경진庚辰이 된다.

그러므로 노름판의 진주인 갑오의 역사적인 기원은 진한의 주인인 단군檀君을 뜻했으니, 주인인 갑오와 단군은 10무극 상제님을 받드는 최고 높은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하지만 이 갑오와 단군은 외적인 진주를 뜻한다. 내면에도 진주가 있다. 이 때의 진眞은 삼진三眞이 되는데 삼진은 우리가 삼신 하느님에게 부여받은 ‘성性, 명命, 정精’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주란 마음과 기운과 몸을 잘 받아 삼신에게 부여받은 본래의 ‘성명정’을 되찾은 사람을 뜻한다. 이것이 곧 내면의 진주다.

2. 진국辰國

단군조선의 진한眞韓은 달리 진한辰韓, 진국辰國으로도 불린다.

먼저 단군세기에는 진한의 기록이 두 군데 보이니 모두 진한眞韓으로 기록했다.

단군세기의 4세 단군 오사구 임인 19년의 기록인 “식달에게 명하여 람진변藍眞弁 3부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하나라를 정벌케 하다”와 6세 단군 달문의 임자 35년의 기록인 “진한眞韓이 나라의 중심을 세우니 다스리는 도리는 오직 항상 새로움이라.”의 기록이 그것이다.

그 다음 삼한관경본기에는 진한眞韓이 진한辰韓, 진국辰國으로 혼용되어 쓰였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의 “진국辰國은 천제의 자손이 다스리는 곳”, 번한세가 하의 “진번眞番 이한二韓의 병사들과 더불어 협공”, 마한세가 하의 “진한辰韓이 스스로 무너졌다”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도경전본훈에는 두 군데 모두 진한辰韓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땅에는 삼한三韓이 있으니 진변마辰弁馬 삼경지한三京之韓이다. 한韓은 즉 황皇이요 황皇은 즉 대大요, 대大는 즉 일一이다”라는 기록과 “‘저울대는 부소량’이라 함은 곧 진한辰韓의 옛 도읍을 일컫는 것”의 기록이 그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불후의 업적인 전후삼한고에서 전삼한과 후삼한을 이야기했으니, 전삼한은 단군조선의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 것을 말하고, 후삼한이란 서기전 194년 번한의 기준이 망한 후, 삼한의 유민이 한수 이남으로 몰려들어 건국한 삼한을 말한다.

아울러 전삼한은 북쪽 대륙에 있었으므로 북삼한이라고 하고, 후삼한은 남쪽 한반도에 있었으므로 남삼한이라고 한다. 단재 선생은 단군조선이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 이유를 삼신 사상 때문이라고 하였다.

3. 진조선眞朝鮮

단군조선 중기[bce1285~bce426]인 22세 색불루 단군 때에 이르러 단군 조선 초기[bce2333~bce1286]의 삼한관경제는 삼조선 체제로 바뀌었으니, 진한은 진조선으로, 마한은 막조선으로, 번한은 번조선으로 바뀐다.

삼한관경본기의 “삼한을 고쳐 삼조선이라 하였는데 조선이란 토경을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렸으되 땅은 옛 진한辰韓 그대로였다. 정사는 천황으로 말미암았는데 삼한이 모두 한결같이 통솔되어 명령을 받들었다.”의 기록은 삼한 체제가 삼조선 체제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삼한관경본기 말한세가 하’의 “여원흥을 명하여 마한馬韓으로 삼아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는 번한番韓으로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를 통 털어 단군관경이라 이름하니, 이가 곧 진한辰韓이요, 역사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 일컬음이 이것이다.”의 기록은 삼조선 체제가 아직 과도기임을 뜻한다. 그 까닭은 위의 기록에서 삼한과 삼조선을 혼용되어 쓰여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한, 번한은 나라 이름이자 왕호임(한韓은 황제皇帝다. <소도경전본훈>)으로, 관경이 막조선, 번조선 체제로 바뀌면 왕호도 또한 막조선, 번조선으로 바뀌어야 할 텐데 아직 마한, 번한으로 불리우고 있음으로 이 것은 아직 제도가 미비 되었음을 뜻한다.

때문에 삼조선 체제는 22세 색불루 단군 때 처음 나왔으나 단군 조선 말기[bce425~bce238]인 44세 구물 단군 때에 비로소 완비 되었으니 소도경전본훈의 다음 기록은 그 명백한 증거가 된다. “삼조선이란 이름이 단군 색불루 때에 처음 나왔으나 그 때는 미비하였는데 단군 구물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비되었으니, 삼한이란 뜻은 분조를 두어 토경을 관리한다는 것이고, 삼조선이란 뜻은 분권을 행하여 토경을 관리하는 제도를 뜻한다.”

4. 남진한南辰韓

신라[bce57~ad935]의 시조 박혁거세가 진한 6부의 추대로 거서간居西干이 되었으니 그 나라 이름이 진한辰韓이다. 그 주체 세력인 진한 6부는 북진한의 이주민임으로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다.

이 남진한은 박혁거세 이전의 진한과 박혁거세 이후의 진한으로 구분되는데 전 진한은 북번한의 마지막 왕 기준이 세우고 진왕(한왕=마한의 왕)이 된 남마한의 간접 통치를 받는 체제를 말한다. 이 때 남마한은 북삼한의 전통에 따라 나라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것이 곧 남한의 마한, 진한, 변한이다.

남마한은 훗날 백제의 시조 온조에 의하여 정복됨으로 인하여 훗날 남진한은 마한으로부터 자연 독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박혁거세의 진한이다.

고구려국본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한 6부 사람들이 공히 존경하여 사로시왕을 거서간으로 삼아 도읍을 서라벌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칭하여 진한辰韓이라 하였으니 역시 가로되 사로라고도 한다.” 그리고 [환단고기-태백일사]에 박혁거세는 남편없이 아이를 임신하여 남쪽으로 피신한 부여의 공주 ‘피소’의 아들로 기록된 바, 부여왕족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5. 대진국大震國

광개토대제 때에 이르러 삼한을 통일하고 구환을 복속시켰던 고구려[bce58~ad668]는 개화 27년 9월 21일에 수도 평양성이 함락됨으로 28대 726년 만에 망한다.

그 뒤를 이어 일어난 진국振國장군 대중상은 고구려의 동북쪽을 도모하여 동모산에 도읍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니 연호는 중광이었다. 그리고 태조 고황제 대조영이 제위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쳐 대진으로 삼고 연호를 세워 천통이라 하였으니, 진국震國은 곧 고구려의 후예를 뜻한다.

규원사화에서는 “고왕의 꿈에 신인이 금부金符를 주면서 말하길 ‘천명天命은 너에게 있으니 나의 진역震域을 통일統一하라’고 함으로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발해의 정식 국명은 대진大震이다. 진震의 뜻은 문왕 팔괘인 ‘건乾, 감坎, 간艮, 진震, 손巽, 이離, 곤坤, 태兌’ 중에서 진震 괘를 상징한다. 진괘란 벼락을 뜻하며 오행으로는 목木을 방위로는 정동방正東方을 상징한다.

한동석 선생의 우주변화의 원리 제9장 신비의 행로 411쪽을 보면 그리스 신화 해석이 나오는데 이에 의하면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는 장남인 진괘를 상징한다. 아울러 제우스는 번개[震]를 들고 있으니 번개는 제우스의 힘의 원천이며,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주역 설괘전에서는 진震괘를 가리켜 ‘제출호진帝出乎震’이라 하였다. 제출호진이란 “상제님께서 진방에서 출세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상제上帝란 하느님이란 뜻이니 대한제국 시대의 애국가를 보면 ‘하느님이 보우하사’가 아니라 ‘상제님이 보우하사’로 되어있다. 진괘震卦는 12지로는 진辰에 해당된다. 삼극 원리로 진辰은 황극皇極의 뿌리 자리로 술戌과 더불어 태극太極의 축이 된다.

황극이란 12지로는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의 전 과정을 뜻하니, 시간 질서 개념으로 보았을 때는 낳아서 기르는 전 과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도법세계에서는 진리를 전하여 길러내는 그 모든 과정이 황극의 역할이니, 그 황극의 첫 기원은 환웅에게 있었던 것이다. 환웅桓雄이란 광명의 스승이란 뜻이니, 환桓이란 하늘광명의 빛과 열로서 인간과 만물을 기르는 존재이며, 웅雄이란 스승이란 뜻이니 진리로서 백성을 길러내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웅이 이 땅 진방震方의 태백산太白山에 오심으로서 황극의 기운이 활짝 열렸으니, 우리가 사는 이 곳은 12지의 정동방正東方인 진방辰方이며 참된 방위가 된다.

진한眞韓을 진한辰韓이라 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천하를 통치하는 참 주인은 황극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곳은 바로 광명이 떠오르는 정동방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황극의 자리는 태일太一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니, 동황태일東皇太一이란 정동방의 황극 정신을 집행했던 동방의 황제 단군성조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황제가 황극皇極의 자리를 대신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대한 민족은 열성조를 중심으로 진방의 후손답게 동방의 패자로서 군림하였고 전 세계의 종주국이 되었다. 하지만 신시 개천 5,905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진방을 남에게 모두 내어 주고, 겨우 남조선의 남한 땅 조그만 곳에 둥지를 틀고 있을 뿐이다.

이제 옛날을 회고해 보면 인류 문명의 뿌리는 동방 한민족이니, 그 문명의 창시자는 태호 복희씨이다. 그 복희씨가 전수한 문명의 핵심은 주역에 있으니, 그 주역의 문왕 팔괘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간방艮方이다. 극동極東의 동북방東北方이 바로 간방이기 때문이다.

주역 설괘전에서는 ‘간艮은 동북지괘야東北之卦也니 만물소성종이소성시야萬物之所成終而所成始也일새 고故로 왈曰 성언호간成言乎艮’이라고 함으로서 이 구석진 자리 동북 간방에서 전 인류의 문명이 끝맺고 다시 시작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소도경전본훈에서는 “일시일종一始一終 회복回復 기其 진야眞也”라 하니, 이는 우주의 역사는, 매순간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맺음이 삼신의 참됨을 회복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간艮은 진眞과 표리 일체 관계에 있으며, 진眞의 완성은 간艮에서 이루어진다.

좀 더 그 까닭을 살펴보면 문왕 팔괘는 후천 개벽에 이르러 정역팔괘가 되는데 간방艮方은 진방震方이 되고 만다. 이것을 역학에서는 진변위간震變爲艮이라고 한다. 이것을 다시 말해 동북 간방에 사는 우리가 정동방인 황극의 자리를 다시금 꿰차게 되어 전 세계를 주재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주, 시베리아, 중국과 연륙된 황해는 다시금 우리의 땅이 된다.

신시본기에서는 동북 간방을 가리켜 “동북은 신명이 머무시는 집이다”라 하였으니, 태양은 광명의 모임이고, 삼신은 광명 속에서만 머무시므로, 삼신이 강림하는 곳은 크게 사람이 광명한 나라인 대한조선大韓朝鮮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소식은 삼신오제본기에 있다. 그 글에 “삼신산은 천하의 뿌리이다. 산山에 삼신三神이란 이름을 붙인 까닭은 대개 상세 이래로 모든 이가 삼신이 이 곳에 강림하여 삼계三界를 뜯어고쳐 360만 대주천大周天을 베푸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삼신상제가 이 땅 동방에 출현하여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세계의 사무친 원한의 불길을 끄고, 상극相克의 질서를 고쳐 상생相生의 질서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그 광명이세光明理世,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세계가 이루어지는 뜻은 다시 주역에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제출호진帝出乎震’이다.

6. 마진국摩震國

궁예가 발해의 남쪽 신라 땅에 세운 나라[ad896~ad918] 이름이 마진국摩震國이다. 궁예가 처음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 했다가 고친 이름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북쪽의 발해 시조 대중상이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 한 것을 대조영이 나라 이름을 고쳐 대진국大震國이라 한 것은 비슷하다.

궁예는 나중에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며 머리에 금책을 쓰고 또 스스로 불경 20권을 지어 간혹 정좌하고 강설하였다. 하지만 승 석총으로부터 “모두 사설 괴담이라 교훈될 것이 없다”는 말을 듣자, 궁예는 화를 내며 쇠뭉치로 석총을 쳐 죽인다.

여기서 중 석총은 후신라의 가장 유명한 고승 진표眞表의 법맥을 이은 사람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표는 망신참법을 통하여 미륵불을 친견한 후, 말세에 이르러 미륵불이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을 굳게 믿고, 그 미륵의 모습 그대로 밑 없는 시루 위에 금산사 금미륵을 세운 인물이다.

그 진표의 미륵신앙은 “고대 신교의 삼신산에 삼신이 강림한다는 믿음”과 결합하여 광범위하게 퍼졌으니 그 법맥을 이은 법상종의 고승 석총이 궁예를 보았을 때는 궁예는 미륵불이 아니라 불법을 어지럽히는 한갖 마구니였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미륵불의 말을 빌려 진표가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훗날 도솔천에 태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7. 대진국의 후예들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고 나라의 폭이 9,000리에 달하던 대진국[ad668~ad918]은 애제 13년에 이르러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홀한성忽汗城이 거란에게 포위되자 항복함으로 15대 259년을 끝으로 망하고 만다.

대진국 멸망한 원인으로 규원사화에서는 청평 노인의 말을 빌려“항상 하느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내더니, 자손에 이르러 교만해지고 방자해짐에 점차 이를 폐지하고 도리어 유교와 불교를 섬기니, 나라가 드디어 쇠잔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자연재해설이 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백두산은 총 세 번 화산 폭발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한철학에 있어서도 진震에는 지진地震이란 뜻이 있다.

대진국이 망하자 발해 황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무리들이 동족의 나라 고려에 투항했다. 그리고 그 뒤 발해의 옛 땅에는 대진국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니, 그 나라 이름은 정안국, 흥요, 대발해국이다.

정안국定安國[97?~97?]은 발해의 옛 땅 서쪽 변두리를 차지하고 세운 나라 이름이다.

흥요興遼[ad1029~ad1039]는 고려 16대 현종 원문대왕 20년에 대진국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인 거란 동경장군 대연림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대발해국大渤海國[ad1116~ad1116]은 고려 16대 예종 문효대왕 11년 정월에 발해사람인 동경 비장 고영창이 요동 50여주를 점거하고 세운 나라 이름이다. 연호를 융기라 했다.

이 대진국의 후예들은 대진국의 부활을 동족의 나라인 고려 조정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이 발해의 모든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것은 대진국 광성문황제 대흥 45년에 고구려의 후예인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당에 대항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제나라를 건국하도록 도와 준 것과 극히 대조된다.

생각해 보면 대진국을 멸망시킨 글단契丹의 뿌리는 15세 대음 단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군세기에 “기미 40년(bc 1622]에 단군께서는 동생 대심을 남선비南鮮卑 대인으로 봉하셨다”고 하였으니, 거란의 뿌리는 또한 조선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리고 대진국의 백성이 되었던 여진女眞의 조상 말갈은 숙신의 후예이니 곧 신지씨의 후손이다. 규원사화에 “단군 왕검께서는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 땅을 주니 산하가 장엄하고 풍세가 강하여 속진국 또는 숙신肅愼이라 했다”고 전한다.

더불어 옛 일을 더듬어 보면 우리 고려의 북방에는 항상 거란과 여진의 두 북방 민족이 이웃하여 있었으니, 거란은 글단契丹이니 단丹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단檀과 동음임으로 단군의 후예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여女는 고려高麗의 려麗와 부여夫餘의 여餘와 동음이며, 眞은 진한眞韓의 진眞과 일치하니 여진은 진한, 부여,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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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둘장 2011/04/23 [14:38] 수정 | 삭제
  • 중국에서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한수가 요동위의 강이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