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왕검의 도읍에 있는 불함산은 어디일까? (21-2부)

불함산의 박달나무 터는 단군왕검의 도읍인 아사달
성훈 컬럼니스트 | 입력 : 2012/02/20 [18:54]
(원문) 10세 노을단군 재위 59년
병오 16년(B.C1935) 동문 밖 십리의 땅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불함산(不咸山)에서는 누워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났다. 천하(天河)에서 거북이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渤海)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석이었다.
기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두었다. 

 
* 병오년 기사에서 발해 연안에서 나왔다는 금덩이 10석이면 엄청난 수량으로, 도량형을 통일한 진시황 때 정한 1석은 중량 단위로 약 60㎏이었다고 하니 780kg정도의 금덩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 기축년 기사의 감성이란 지금의 천문대를 말하는 것으로, 별과 해와 달의 움직임을 살펴 농사 및 군사에 이용하고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쳤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183년 후인 B.C 1733년에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천문현상을 관찰하게 되는데, 이 기록은 조선의 과학적 위대함을 밝히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 오성취루 현상에 대해서는 13세 흘달단군 조에서 상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 <단군세기>에 기록된 조선의 천문현상을 박창범교수가 컴퓨터 시뮬레이션한 결과    

단군왕검의 아사달과 관련 있는 불함산은 어디일까?  

병오년 기사에 나오는 불함산(不咸山)은 단군왕검의 도읍인 아사달과 관련이 많은 산이다. <삼성기전 상>에 "신인 왕검(神人王儉)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 터에 내려오셨다.”는 기록이 있고, 그 외 <환단고기> 곳곳에 여러 차례 단군왕검과 관련된 산으로 나타난다. 또한 3세 가륵단군 기사에 "병오 8년 (B.C2175)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는 연기 일어남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하시어 조세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분명 조선의 도읍지인 아사달이거나 그곳과 가까운 산명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불함산은 과연 어디일까? 

<산해경 대황북경>에 “대황의 가운데 불함산이라는 산이 있으며 숙신의 나라가 있다.(大荒之中有山名曰不咸有肅愼之國)”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만주에 있는 완달산(完達山)으로 보는 재야사학자들이 많다. 이는 조선의 위치를 만주로 보기 때문인데, 분명한 것은 <산해경>에서는 만주에 있는 산과 바다를 설명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함산은 과연 어디일까? 그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숙신에 있다. 

읍루국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번역) 읍루국 : 한나라 이전의 숙신이다. <진서동이전>에 “숙신씨 일명 읍루는 불함산 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대해변에 있고, 서쪽으로 구만한국에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고 그 땅은 넓고 길이는 수 천리에 이른다.
(원문) 挹娄国 : 汉以前之肃慎也,《晋书东夷传》“肃慎氏一名挹娄,在不咸山北,东滨大海,西接寇漫汗国,北彬弱水,其土界广袤数千里,”

또한 약수(弱水)에 대한 중국사서의 설명 중, 읍루에 대해 언급한 문구가 있다.
(번역) “<후한서 동이전>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 <진서 사이전> 읍루국 동쪽 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이다. <호위우공추지> 약수는 산묘위 서남 궁석산에서 나와 동북으로 거연택으로 들어간다. 그 하류는 돌아오는 곳을 모른다. 약수는 연택에서 동북류해 부여를 지나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원문) 《后汉书东夷传》夫余国北有弱水,《晋书四夷传》挹娄国东滨大海,北极弱水,《胡渭禹贡锥指》弱水出山庙卫西南穷石山,东北入居延泽,其下流不知所归,似弱水自居延泽东北流,厯夫余,挹娄之北境而归于东海,
(필자 주 : 여기서의 동해는 감숙성을 흐르는 황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 내용을 종합해보면 내몽골 서남단에서 발원해 감숙성을 흐르는 약수 남쪽인 청해성이나 감숙성 동부에 부여가 있었고, 그 동쪽에 숙신(=읍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읍루의 동쪽에 대해가 있어야 하니, 읍루는 현재의 감숙성 동부나 섬서성 북부의 황하변으로 추정된다.  

중국 사서기록의 상투적인 수법대로 부여국과 읍루국(숙신)을 마치 단군조선과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기술해 놓았으나, 이는 각 지역을 다스리던 제후(욕살)로 모두 조선대연방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여러 기록으로 보았을 때, 단군조선의 중심지가 기존 재야사학의 이론처럼 만주나 한반도가 아니라 훨씬 더 서쪽인 황하 중상류 부근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다. 

▲ 부여와 숙신(=읍루)의 위치는 약수와 청해가 어디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역사복원신문

천하(天河)와 발해(渤海)는 어디일까? 

병오년 기사에서 거북이가 나타난 천하(天河)가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재야사학에서 말하는 바이칼호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이칼호수는 물이 차서 거북이가 살 수 없는 환경이며, 우리 역사의 기록과 별로 상관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해(天海)로 표현하지 않고 천하(天河)로 표현한 것을 보아서는 호수가 아니라 큰 강으로 보이며, 하늘(天)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 큰 강의 상류 발원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여 추측컨대 황하(黃河) 또는 산서성을 흐르는 분하(汾河)의 발원지로 보인다.  

특히 분하가 시작되는 곳에는 분원천지(汾源天池)가 있고, 거기서 발원된 분하가 고대 압록수로 불렸으므로 그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분원천지가 우리 민족의 진짜 천지(天池)였으며, 그곳에 바로 백두산의 다른 이름인 백산(白山)이 있었다. <삼성기전 상>에 “환웅천왕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백산이 바로 <신당서 열전 동이전>에 언급된 기록한 말갈(=고구려)의 백산으로 분원천지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중국에는 천산(天山)천지, 분원천지, 백두천지의 3개의 천지가 있는데, 이중 하나가 우리 역사의 천지일 것이다.
상세한 것은 아래 “우리 민족의 백두산과 천지는 원래 어디일까?”를 참조 바란다.
(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60&section=sc6&section2=)  
▲ 분원천지라 불리는 산서천지의 모습과 규격은 백두산 천지와 흡사하다. 이 천지가 우리 민족의 진짜 천지이다.
▲ 분원천지 옆에 있는 분하의 시원지인 분하원두(汾河源頭) 라는 표지석            ©역사복원신문
발해는 현 중국의 요녕성, 하북성, 산동성에 걸쳐있는 내해(內海)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가로 100리 X 세로 300리나 되는 큰 내륙호수인 대야택(大野澤)을 말하는 것이다. 상세한 설명은 아래 글을 참조 바란다.
(제목)‘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왜곡한 중국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50&section=sc7&section2=)
▲ 원래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큰 내륙호수로 중국 사서의 동해이다. 


세계 놀이문화의 원형인 윷놀이와 그 철학

윷놀이는 인류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놀이의 기원이면서, 여러 민속놀이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교훈적이며 가장 철학적인 놀이이다. 미국의 세계적인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1858∼1929)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조선의 윷놀이에 대해 전 세계 모든 놀이의 원형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 놀이방법과 의미를 연구해 세계에 공표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대학 고고학박물관 관장으로 재직하던 1895년에 저술한 󰡔한국의 놀이󰡕(열화당)라는 책에서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며 “고대 점술에 기원을 둔 윷놀이는 우주적이고 종교적인 철학도 담고 있다”고 극찬했다. 

윷놀이는 우리 고유의 놀이로 한자로 척사(擲柶), 사희(四戱), 사목희(四木戱)라고도 불렀다. 윷말은 한문으로 사마(柶馬)라고 하고, 윷판[馬田]은 말밭, 말판, 윷밭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사도(柶圖)라 쓴다. 윷판에 대해서는 말판을 천문도로 보는 견해, 천부경의 원리를 윷판으로 나타냈다는 설, 주역의 이치를 표현하여 역학의 수리철학을 담고 있다는 설 등이 있다. 

윷놀이에 대해서는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가 주장한 오가(五加)의 출진도(出陣圖)에서 나왔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도, 개, 걸, 윷, 모가 부여의 중앙과 사방을 다스렸다는 관직명인 저가(猪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우가(牛加), 마가(馬加) 등에서 왔다는 것이다. 또한 사출도(四出道)는 전시체제에서 군사조직의 출진도(出陣圖) 모형이라고 한다. 놀이의 행마법이 오가의 가축이름이 이용되면서 몸의 크기와 걸음의 속도가 윷놀이에 반영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개가 빠르게 달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윷놀이는 단순한 승부를 겨루는 유희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농경사회에서 윷점이 성행해 농사나 신수를 점치는 예언적 의미로 변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에도 저포(樗蒲), 격양희(擊壤戱)가 있고 만주와 몽골에도 비슷한 놀이가 있으나 그 방식도 다르고 널리 유행하지도 않았다 한다. 

▲ 멕시코인들도 우리 윷놀이와 비슷한 놀이를 한다. 스튜어트 컬린의 말을 입증해주고 있다.    



원본 기사 보기: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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