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를 멸망시킨 코리안

절대 공포의 상징 "아틸라 황제"
템즈 | 입력 : 2008/02/05 [09:03]
▲     ©런던타임즈

 
  ▲ 신의 징벌
아틸라 황제 16c-별칭은 flagellum del (라틴어로 '신의 징벌'이라는 뜻) 
 
독일 고전문확의 최고봉으로 뽑히는 니벨룽의 노래 [ das nibelungenlied ] 뿐만 아니라,힐데브란트의 노래(hildebrandslied),발타리우스 (valtarius),영웅서사시집 (das heldenbuch),위드시드 (widsith), 최근 영화화 된 반지의 제왕에서도 절대적 힘의 상징으로 거대한 상상의 보고가 돼왔던, 더구나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놨던 한 인물을 초대하고자 한다. 독일과 미국 방송에서조차 그가 한국계라는게 언급됐다면 그를 한번쯤 인터뷰 해봄직하지 않은가. 이번 주 역사 인터뷰에서는 아시아와 유럽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훈족의 아틸라 황제(395-453)를 초대하였다.
 
 
 
템즈: 한국계라는 게 오해의 소지가 있어 우선 흉노와 훈족과의 관계를 설명해야 될 것 같군요. 지금도 흉노와 훈의 상관관계가 극심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황제께서 직접 언급해주셨으면 합니다.

아틸라: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인 스트라보, 1세기 때의 지라학자 오로시우스, 2세기 때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작성한 지도의 훈족 거주지역이나 중국측 사료의 흉노 거주지역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355-365년 알란족을 침공한 주체를 중국의 위서는 흉노로 기록하고 있고 당시 라틴 학자인 마르셀리누스는 훈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저의 외모에 대한 중국이나 서양의 기록은 똑같이 그려졌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기록이 한사건을 똑같이 묘사하고 있다면 그 묘사된 역사는 발음에서 차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같은 사건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템즈: 횽노와 훈족이 같다면 그럼 한민족과의 연관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아틸라: 그 질문 하나로 며칠을 이야기 해도 모자랄 것 같군요. 간략히 중국 역사를 언급하는게 낫겟습니다. 진시황이 전중국을 통일하고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만리장성의 축조입니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북방의 흉노족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횽노는 진나라 이전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요. 만리장성 이북을 고대 중국인들은 흉노라고 불렀습니다. 한단고기라는 책자에도 나와있듯이 조선(고조선)은 '구려'라고 불리웠으며 그 뜻은 '9개의 민족이 구성한 나라' 라는 뜻 입니다. 고구려 곧 옛 조선은 흉노의 한 일파였지요. 특히 신라 30대 문무왕은 그의 비문에서 우리 조상을 흉노인 김일제라고 밝혔습니다. 신화상의 인물이 아닌 중국 역사에도 당당히 기록돼 있는 지금 중국 서안에 무덤까지 있는 김일제가 흉노의 후예라 했으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겠지요.

템즈: 아직까지도 환단고기는 정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아틸라: 아퀼리아의 크리프타 아프레스 교회의 로마기병과 일전을 벌이는 훈족 기병의 벽화가 보여주는 훈족의 활은 중국 한족이나 유럽식 활이 아닌 고구려인들이 쓰던 예맥각궁과 흡사합니다. 당시 투르크 계열이 사용하던 활과도 다른 것 입니다. 이 단궁은 반발력이 다른 활의 4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속사도 가능했고요. 이 발달된 활 덕분에 훈족 곧 흉노족이 유럽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유럽의 사료에 묘사된 훈족들은 솥을 말 안장 뒤쪽에 묶고 다녔다고 했는데 이는 신라 토기에 등장하는 기마인상의 말안장과 말 엉덩이 부위에 고정된 솥이 일치하는 것 입니다.
 
 

▲     ©런던타임즈

흉노 기마병과 흡사한 신라토기 
 
템즈: 곁가지로 나가는 질문같습니다만 조금 전에 말씀하신 문무왕의 비문에 호기심이 동하는군요. 그쪽을 상세히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직까지 문무왕 비문에 대한 해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요. 김일제가 확실히 흉노의 후예라면 [문무대왕릉비문]에 적시된대로 신라 조상은 흉노족이 되겠으니 말입니다.

아틸라: 김일제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인 휴도왕에 대해 말씀드려야 순서가 될 것 입니다.
진시황제의 장남인 부소의 후예로 어떤 학자들은 보고 있는데 진시황이 흉노를 방비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그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다만 진시황의 사후 흉노족의 일파였던 휴도의 일부세력이 고구려를 경유하여 신라 땅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이 계열이 지금 경남 밀양에 자리를 잡고 박씨성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한편 휴도왕이 이끄는 주세력은 돈황쪽에 정부를 세우고 진나라 이후 정권을 잡은 유씨족의 한나라와 대치하게 됩니다. 휴도왕을 북쪽 오랑캐 흉노라 멸시하던 한나라 정권은 초기에는 자기 나라 공주를 휴도왕에게 바칠정도로 그 흉노세력에게 밀리고 있었지요.

한나라 7대 황제에 등극한 무제(bc 156-87)는 흉노타도를 기치로 내세웠습니다. 휴도왕이 곽거병의 지략에 말려 전사하고 나서 그의 두 아들이 무제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 때 받은 새로운 성씨가 김 입니다. 형의 이름이 위에서 언급한 김일제가 되고 동생이 김윤으로 불렸지요. 한왕조에 충성한 댓가로 김일제는 한무제의 무릉 곁에 공신중의 공신으로 배장됩니다. 이 김일제의 후손으로 상과 건이라는 두 아들이 있는데 이 두 아들 또한 한 왕실의 실세로서 등장합니다. 김일제의 5대손인 '성'이 바로 [문무왕비문]의 성한왕이 되지요. 이 성한왕이 경주로 들어와 신라시조인'김알지'가 되고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아들이었던 김안상의 5대손 탕이 가락국으로 망명해서 가락김씨의 시조인 '김수로'가 되는 것 입니다.

템즈: 한 왕실의 최고 실세가 되던 김씨 일파가 어째서 한국땅으로 망명을 오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아틸라: 왕망이 한왕조를 멸망시키고 '신'왕조를 세우는데는 김씨 계열의 도움이 컷지요.
왕망이 세운 '신'제국에서도 김씨 계열은 강력한 정치실세가 됩니다만 15년만에 이 신제국이 망하자 당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일파는 도륙을 피하기 위해 출신성분을 속이고 망명의 길에 올랐습니다.  
 
▲     ©런던타임즈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  
 
▲     ©런던타임즈
▲     ©런던타임즈
<훈족(흉노)의 기마 전투 장면, 고구려의 수렵도에서의 무사와 같은 활을 사용하고 있다(이탈리아 아퀼레이아 소재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  
 
 
템즈: 흉노와 고구려에 대해서도 짧게 부탁 합니다.

아틸라: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이 고구려에게 흉노를 치자고 합니다만 고구려는 오히려 왕망이 건국한 '신'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에서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 동천왕 7년(ad234), 그의 사신들을 고구려에 파견할 때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측 사료에 나오는 흉노는 북방 기마민족을 총칭하는 의미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곧 중국인들은 중국인이 아닌 민족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는데 특히 한민족과 관련된 민족을 통칭해서 동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흉노는 선비족이며 선비족은 동이족이라는 견해가 정설로 통하고 있는 것이 중국 사료 입니다.
 
 
템즈: 흉노는 선비족과 연합한 중국 후한에게 멸망당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같은 족속끼리 전쟁을 치룬 것인데...

아틸라: 선비족은 그후 후연이라는 나라를 세우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예나 지금이나 큰 전쟁은 동족간의 전쟁으로 봐야지요.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둔 이스라엘과 아랍세력이 그렇듯이...

템즈: 이제 본격적으로 아틸라 장군의 배경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훈족이 흉노의 후예라면 어떻게 고대유럽의 판도를 쥐고 흔들었는가 하는 것이 이번 인터뷰의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틸라: 위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한과의 극심한 전쟁후 흉노나 한은 모두 해체의 길로 들어서게 되지요. 흉노는 기원전 57년에 동서로 나뉘게 되고 동흉노는 다시 남북으로 갈리고 350년 한족과의 전투에서 북흉노가 결정적 패배를 당한 뒤 흉노계열은 역사에서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동흉노 잔존 세력이 한반도 남쪽으로 동천했다면 서흉노는 유럽쪽으로 서진을 했지요.
저는 고구려 광개토왕보다 20년 늦은 395년에 당시 서유럽을 발밑에 두고 있던 문주크왕의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제 위로는 블레다 형이 있었고요. 당시 로마는 훈족에게 공물을 주며 화친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저는 왕자로 태어난 까닭에 당시 외교 관례대로 적국의 궁전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템즈: 그 때 호노리아 공주를 알게되셨습니까?

아틸라: 그렇소. 그후 434년에 훈족의 왕 후임자였던 삼촌 루가가 사망하자 제 형인 블레다와 제가 공동 통치자로 40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힘을 잃어가던 로마는 약속한 공물을 제 때 보내지 못했어요. 저는 형과 함께 동로마로 진격해서 공물을 두배로 올리는 서명을 받은 후에 평화협정을 체결했지요. 443년에 형이 사망한 뒤로 저는 훈족의 단일지도자가 되었고요. 제가 다스린 훈제국은 남으로는 발칸반도, 북으로는 발트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그리고 서쪽으로는 현재 프랑스 땅을 넘어서 영국에 까지 확장되었습니다. 450년 저는 호노리아의 반지를 받게 됩니다. 그 의미는 구혼을 의미하는 것 이었지요. 저는 당시 서로마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3세에게 결혼 지참금을 요구 했습니다.

템즈: 당시 아틸라 황제께서 요구한 로마 제국의 절반이라는 결혼 지참금은 무리 아니었습니까?

아틸라: 로마제국의 전부를 요구한게 아니라 절반만을 요구했습니다. 제 요구사항이 묵살되었을 뿐아니라 호노리아 공주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까지 보내버리더군요. 저는 이것을 빌미로 451년에 갈리아 지역(현재의 벨기에, 프랑스의 메츠, 랑스, 오를레앙)을 점령했습니다. 이 때 '최후의 로마인'으로 묘사되는 제 어릴적 친구인 아에티우스가 서로마 총사령관으로 저와 지금의 프랑스 트루시아시 벌판에서 마주섰습니다. 451년 6월20일이었지요. 세계 최초의 대전이었을 겁니다. 각각 20만 대군으로 '살롱 대전투'를 서로 적이 되어 진두지휘했습니다. 적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우정을 느낄수가 있었지요.

템즈: 감회가 새롭겠군요. 15만이라는 전사자를 낳는 대전투를 치룬마당에 친구간 우정이라니..아무튼 그 세계대전은 어찌 끝이 났습니까?

아틸라: 서로가 너무 잘 아는 까닭에 승부는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듬해 452년 서로마로 직접 진군했지요. 북이탈리아 전역을 쓸어버렸습니다. 당시 해안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나 여기 있다(venietiam)'하고 외치더니 지금의 베네치아(venezia)로 불리워진다면서요?
 
 
▲     ©런던타임즈

<영국까지 점령한 훈제국> 
 
템즈: 느닺없이 로마 진군을 멈춘 이유가 있습니까?

아틸라: 레오1세가 협상자로 제 막사에 찾아왔습니다. 이 상황은 라파엘로가 잘 그려 놨으니 보시면 알겁니다. 이 협상으로 레오1세는 나중에 '위대한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고 로마를 구하게 되지만 저는 북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과 전쟁 배상비를 챙겼습니다.
무엇보다 로마 진군을 멈춘 이유는 언제든 로마는 손아귀에 있다고 보았지요. 더구나 보다 근본적 이유는 당시 제 군대를 덥친 말라리아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말라리아에 걸려 다음해에 죽게 됩니다만...
 
▲     ©런던타임즈
  <아틸라와 레오1세의 협상.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 중에 한 명인 라파엘로가 그린 바티칸의 벽화로 두 사람이 말 위에서의 협상 그림  >
 
템즈: 그럼 황제의 죽음이 [니벨룽겐의 노래]에 나오는 크림힐트와의 결혼식 첫날밤 독살당한 것이 아니었나요?

아틸라: 천만에요. 그것은 후대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한 겁니다. 제 사인은 말라리아 였음을 조금만 관심깊게 보아도 알 것 입니다. 사실 레오1세와의 협상도 그림에는 발위에서 벌어진 것으로 묘사 됐으나 저는 막사밖에도 못나갔어요. 저의 건강이 탈로 될까봐 일부러 꾸민거지요. 말 위에서의 장장 10시간 협상이라....ㅎㅎ

템즈: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는데요. 아틸라 황제께서는 단독으로 훈족을 다스린 것이 불과 10년 밖에 되지 않는데 동시대인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금도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황제의 특별한 리더쉽을 말씀해 주십시요.

아틸라: 제 친구인 서로마 장군인 아에티우스와 살롱대전투를 치룰 때 훈족으로만 구성된 부대는 고작 만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자체 병력보다 수십배가 넘는 외인들로 구성된 군대임에 불구하고 일사분란한 지휘체계가 통했던 것은 이들 외국인으로 구성된 장병들을 차별하지 않고 준훈족으로 우대하여 친구이며 동반자로 대했기 때문 입니다.
 
당시 로마 지배세력의 외인차별과는 판이한 것이었죠. 이것은 저의 보좌관인 오레스테스, 비서실장인 콘스탄티우스가 이태리인이었으며 유도시우스, 시종관 오네기시우스, 스코타등 저의 최측근 보좌관들 출신이 거의 외국인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복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자유 또한 존중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이 저의 죽음으로 인해 결실을 맺지는 못했으나 나중에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차용했습니다. 적의 성을 공략할 시에는 2-3일간의 여유를 두어 선전포고를 합니다. 항복하면 풀 한포기 다치지 않게 하지만 반항할 시는 돌무더기 하나 남김없이 초토화를 시키는 것 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초토화가 있었던 곳에서도 아녀자에 대한 겁탈이 없었다는 겁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공포보다는 증오를 일으키게 됩니다. 저나 후세의 징기스칸이나 적들에게 증오를 일으키기 보다는 감히 대항할 염두를 내지못하는 공포심을 일으키길 원했지요. 그리고 고구려 무용총의 호랑이 사냥그림에서 나타나듯이 기마병들의 궁술이 뛰어났을 뿐아니라 작전 또한 치밀했지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에 대한 공포는 말그대로 절대적 공포심이었습니다.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고 적이란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그들에게 우리의 등장은 충격적이었지요. 그래서인지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조차 우리에 대한 기록을 회피하는듯 하더군요. 자랑스러운 로마가 야만족으로 표현되는 동양의 훈족에게 멸망당한 시실을 되돌리고 싶도록 부끄러웠던 역사이었을 겁니다.


템즈:아무리 감추고 싶어도 신화와 전설속에 남아있는 아틸라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상상력 창고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부터 1,600여년전 역사상 인물을 추적해 보았습니다.그의 뿌리가 한민족과 연관이 깊다는 것만으로 이번 인터뷰가 끝나서는 안 될 것 입니다. 서구인의 눈으로 씌여진 역사의 허구를 역사적 사료와 과학을 빌어 바로 잡고 잃어버린 현대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되세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 박목사 2009/10/19 [17:57] 수정 | 삭제
  • 잘있는가........................................................
  • 템즈 2008/02/14 [04:52] 수정 | 삭제
  • 기존 식민사관으로 볼 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상상력 입니다만 한민족사에 대한 정립차원에서는 충분히 제고해볼만하지 않겠습니까?
    댓글 감사합니다.
  • 길손 2008/02/13 [23:35] 수정 | 삭제
  • 무리한 확대 해석인 것 같군요.
    모 교수는 수메리안이 한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목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한 민족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 저것 자료를 끌어모아...끌어다 붙이는 이런 주장들은
    한민족 사의 정립에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로마를 멸망시킨 코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