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전쟁(Boer Wars)-세계 근대사의 첫쪽

20세기 세계질서 개편의 신호탄
김지호 | 입력 : 2010/01/19 [08:48]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예고한 사건이 바로 보어 전쟁(boer wars)이다.

영국의 남아프리카전쟁이라고도 하는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이 전쟁은 20세기 초 열강들의 이합집산을 촉발하였다.    
 
▲   보어전쟁 (bore war)  ©런던타임즈 londontimes

보어전쟁이란 영국이, 현재 남아공 북동쪽에 위치한, 보어(boer)인들의 자치국이었던 오렌지 강 유역의 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과 트란스발 지역의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n republic)-일명 트란스발  공화국과 두 차례(1880-1881, 1899-1902)에 걸쳐 벌인 전쟁을 말한다. 
 
 
▲ 보어인 3세대- 총을 쏠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런던타임즈 londontimes
 
화란말로 농부를 뜻하는 보어(boer)인들은 18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거주해온 사람들과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남쪽의 케이프(cape) 지역에서 19세기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아프리카 말도 유창하게 구사하며 목축을 주업으로 하던 이들은 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동쪽의 플란더즈, 프랑스, 독일 등에서 건너 온 대부분 개신교도들이다.


▲  무장한 보어인들 - 목축을 하여 기동성과 게릴라전에 강했다.    ©런던타임즈 londontimes

▲   로드 로버트 장군 
▲  크루거 대통령
1850년대 초에 두 지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 받았으나 1877년 다시 영국령으로 복속시키자 1880년에 독립전쟁인 1차 보어전쟁이 발발했다.
 
1881년 2월 마주바 고지(majuba hill)에서 보어군이 승리하여 1881년 3월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 프레토리아(pretoria)에서 협약을 맺고 보어는 자치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후 트란스발에서 다이아몬드에 이어 금광이 발견되자 영국은 이 지역을 다시 합병하려 하였고 트란스발의 대통령 크루거( paul kruger) 를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1899년 10월 로버트 경 (lord robert)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의 공격으로 2차 보어전쟁이 시작되었다.
행운이라고 믿었던 금광이 불러 온 재앙이었다.


▲  전장으로 떠나기 전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사열하고 있는 영국군 - 윈저궁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전황은 기후나 환경등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과 기동력을 갖춘 보어인들의 게릴라식 공격으로 인해 영국에게 결코 쉽지 않은 전쟁이 되었다.    
 
영국은  캐나다와 인도 그리고 뉴질랜드에 주둔해 있던 병력들을 남아프리카 전장에 대거 투입하며 국가의 운명을 건 총력을 이 전쟁에 쏟아 부었다.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은 독립의사를 보이는 식민지 처리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며 영국이 벌이는 대규모 전쟁을 지켜 보았다. 
 
이들에게는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던 영국의 완승도 식민지의 독립도 모두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   당시의 마차 앰블란스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치열한 전투는 3년간이나 지속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영국군이 승리하였고 1902년 5월 베리니깅(vereeniging) 조약 체결로 두 지역을 다시 영국령인 케이프에 복속시켰다.
 
이 전쟁을 끝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도 19세기도 막을 내렸다.
새로운 20세기를 알리는 지각변동이었던 것이다.


▲  '부상자를 위한 모금'  팻말을 걸친 보어인 인형 - 뒤에 검은 모자는 크루거 대통령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전쟁은 정글의 법칙에 따라 승자가 정의다. 영국군을 이끌었던 로드 로버트 장군은 영국인들의 영웅이 되었고 영광은 여왕에게 바쳐졌다.
 
엉클 크루거로 불리며 아프리카인들에게 사랑을 받던 크루거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는 2차 보어전쟁 발발 이듬해인 1900년에 망명길에 올랐고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을 전전하다가 1904년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40년 후 독일 나치에 의해 반영국의 상징으로 되살아 났다.  


▲  승전소식에 환호하는 런던 시민들-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영국인들은 워털루 이후 최대 전쟁에서의 승리에 모두들 열광했다.
 
하지만 영국의 수뇌부는 고독한 영광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열강과 선별적 동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영국은 러시아에 이어 1901년 이또 히로부미의 방영을 계기로 보어전쟁이 끝난 해인 1902년에 일본과 전격적으로 동맹을 체결한다. 동아시아에 있던 식민지들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러한 동맹구도는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서도 유지되었다.
 
이는 일본의 부상과 러일 전쟁을 알리는 세계질서 개편의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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