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漢字)의 기원은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 (3-2부)

중국이 주장하는 한자의 기원은 명백한 역사왜곡
성훈 컬럼리스트 | 입력 : 2011/07/11 [16:23]

중국은 현재 쓰고 있는 문자인 한자를 황제헌원 때 창힐(동이족)이 새와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고 창안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이 쓴 아래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에 따르면, 헌원이 스승인 동이의 자부선인(紫府仙人)에게 녹서(녹도문자)로 된 내황문(삼황내문경)을 배워왔으므로 그러한 중국의 주장은 허구임을 알 수 있다.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분인 <단군>이 계셨는데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임금 때의 일이다.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東夷)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 하는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이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와 염제신농의 뒤를 이어 중화의 임금이 되었다.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위의 기록을 <태백일사 소도경정본훈>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마음을 씻고 의로움(義)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청구국(배달국) 대풍산의 남쪽에 있는 삼청궁에 사셨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지명)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은 신시의 녹서(鹿書)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하고 주(註)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위 기록은 황제헌원 이전에 이미 녹서(녹도문자)라는 문자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문자는 배달국 1대 환웅천왕 때 만든 태고문자(太古文字)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따르면 “환웅천왕이 신지 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신지는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하는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모든 명의 출납을 육성에 의존했을 뿐 문자로 기록하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는데 암사슴을 보고 활을 쏘려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종적을 놓치고 말았는데, 사방을 수색하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찾게 되어 사슴이 도망간 곳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기록으로 남기는 법은 오직 이것뿐이다.”라고 크게 깨닫고는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문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그 문자는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는 다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태고문자는 한자처럼 형상을 나타내는 문자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녹도문자 즉 녹서(鹿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의하면,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태호복희에게는 용서(龍書), 자부선인에게는 우서(雨書), 치우에게는 화서(花書),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는 널리 쓰여졌다. (중략) 지금 그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로 기록되어 있어 신시시대에 상형문자가 만들어진 이후 여러 번 글자모양이 바뀌었는데 사용이 불편하여 나중에는 다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위 기록에서 보듯이, 황제헌원은 환웅천왕 때 만들어진 녹서를 동이(東夷)의 자부선인에게 배워다가 썼을 뿐인데 어찌 헌원의 신하 창힐이 지금 한자의 기원인 문자를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중국은 은나라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을 현 한자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대단히 잘못된 주장이다. 
 
▲ 고려말 충신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자,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 김충한과 함께 6은으로 불리웠던 農隱 閔安富의 유품인 천부경문.  1899년 은허 발굴 갑골문과 대조해보니 유사했다. 

 
<태백일사 소고경전본훈>에 따르면, "천부경은 천제 환국(天帝桓國)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로 환웅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 혁덕에게게 명하여 녹도(鹿圖)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최치원이 일찌기 신지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다.
 
 
단군왕검에 의한 문자 창제

그렇다면 지금의 한자는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그 기록을 보기로 하겠다.
(단군세기 원문) “왕검께서는 명을 내려 팽우(彭虞)에게 토지를 개간하게 하시고, 성조(成造)에게 궁실을 짓게 하시고,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셨다.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시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장하게 하시고, 희(羲)에게 괘서를 주관하게 하시고, 우(尤)에게 병마를 관장하게 하셨다. 비서갑에 사는 하백의 따님을 맞이하여 황후로 삼고 누에치기를 맡게 하시니, 백성을 사랑하시는 어질고 후덕한 정치가 사방에 미치어 태평해졌다.”

위 기록에서 보듯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였던 조선대연방(朝鮮大聯邦)을 세운 단군왕검 때 새로운 문자가 창제되기에 이른다. 단군왕검께서 신지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이 문자가 배달국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녹서를 개량한 것인지 아니면 획기적인 새로운 문자였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이 문자가 지금 한자의 기원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신시시대에 만들어진 문자가 사용이 불편하다보니 다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시기는 단군왕검 때로 보이며, 이전보다 훨씬 편리한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나을에게 호적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편리한 문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67년 갑오(B.C 2267년) 단군왕검께서는 제후인 순임금의 나라에 홍수가 크게 나자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순임금이 보낸 우사공(虞司空)을 만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도 기록되어 있다. “창기소라는 사람이 자부선생이 만든 칠성력의 법을 재연하여 이로써 ‘오행치수’의 법을 밝혔다. 순임금 사람인 사우(하나라 시조)는 회계산에 이르러 조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허선인을 통해 창수 사자 부루(왕검의 태자)에게 뵙기를 청하여 <황제중경(黃帝中經)>을 받으니 이것이 신시황부의 중경이다. 우임금이 이를 취하여 쓰니 치수에 공이 있었다.” 이 역시 단군왕검 때 만든 편리한 문자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 2세 부루단군 10년 경술(B.C 2231년)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밭문서를 만들 정도로 대중적으로 사용하기 편리한 문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3세 가륵단군 2년 경자(B.C 2181년) “지방마다 서로 말이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키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가림토문자가 나오기 이전에는 상형문자인 진서(眞書:한자)로 모든 문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 3세 가륵단군 때 상형문자인 진서가 불편하여 소리글자 38자를 만들었다.         

1년 후인 B.C 2180년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를 편수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도 역사책이란 소리글자인 한글전용으로 쓰기가 어려운 법이라 당시 일년 전에 만든 소리글자인 가림토 문자로 배달유기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것 같지는 않고 아마 뜻글자인 진서(한자)로 편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로 단군조선 초기에 광범위하게 문자가 쓰인 것으로 보아 그 문자는 예전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한 것으로써, 사용하기 불편한 녹서(鹿書)를 대폭 개량한 획기적인 상형문자인 진서(眞書)를 단군왕검 때 새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지금 한자의 기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진서의 오리지날은 배달국 환웅천왕 때 신지 혁덕이 만든 녹서(鹿書)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때의 갑골문자가 현 한자의 기원이라고 하나, 하(夏)나라와 은(殷)나라도 동이족의 나라였으니 이 또한 모두 단군왕검의 후손들인 것이다. 중국 사학자들의 공동저서인 <고사변>에 따르면, “현조(玄鳥:검은새)는 은나라와 동이족의 조상신이다. 동이와 은나라 사람은 같은 종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 태호(복희), 제준, 소호(금천), 제곡(고신), 제순(순임금) 그리고 은나라 조상인 설 등이 동이족과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참고로 은나라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운 이후 약 600년 후에 동이족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이다. 

그들이 원래 있던 편리한 문자를 안 쓰고 새로운 문자를 창제해 썼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은나라 때 문자를 만들었다는 어떤 기록도 없고 단지 1899년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갑골문자 유물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단군조선은 이들 나라와 서로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단군왕검 때 만든 문자(진서)를 은나라가 가져가 쓰다가 그것이 갑골문자로 남겨져 유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산동성 창러(昌樂)현에는서 갑골문보다 1,000년이나 앞서는 골각문자가 발견되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중국 고고학자들이 "당시 산둥지역은 한민족을 포함한 동이(東夷)족들이 집단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이 골각문자는 동이문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문자의 모양도 고대 상형문자인 동이문자 계열에 속한다. 은허 지역에서 발견됐던 갑골문자도 동이족의 골각문자가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즉 각골문자는 배달국의 녹서(鹿書)로 보이며, 갑골문자는 단군왕검 때 만든 진서(眞書)로 보인다.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자는 은나라의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단군조선의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갑골문자가 발견된 하남성 안양현도 단군조선의 영토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왼쪽은 산동성 창러현에서 발견된 골각문자로 가운데 은나라 갑골문자보다 천년이나 빠르다. 산동성은 대대로 동이족의 영토였다.     ©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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