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문화브랜드로 부상하는 '제인 오스틴'

김지호 | 입력 : 2011/08/08 [21:08]
올해는 제인 오스틴의 첫 출판 작품 ‘센스 엔 센서빌리티’ 의 출간 200년이 되는 해이다. 18세기 영국 중상류층 여성들을 그려낸 그녀의 작품들이, 사후 한때는 사회의식이 부족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치부되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섬세하고 재치 있는 묘사로 남녀관계에 물질지향적인 도덕의식을 파헤친 점들이 19세기 말부터 재조명되면서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근래에 영화화된 ‘오만과 편견’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이 잇따라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대중적 인기의 두터운 저변을 증명하고 있다. 

▲ 차톤(Chawton)에 있는 제인 오스틴하우스    © 런던타임즈 LONDONTIMES

 
지난 7월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미완성 원고 ‘더 왓슨(The Watsons)’이 무려 99만 파운드(한화 약 17억)가 넘는 금액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었다. 경매 전 소더비측은 30만 파운드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감정했으나, 무려 3배 이상의 금액에 옥스포드 대학의 보들리 도서관에 낙찰되었다. 완성이 되었다면 1/4 권 정도의 분량으로 추정되는 68 쪽 원고의 첫 부분 12쪽은 현재 뉴욕의 모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1차 대전 당시 적십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 팔았기 때문이다. 이번 경매에서 최대의 경쟁자는 예상대로 모건 도서관이었으나, 국가유산기념기금(National Heritage Memorial Fund)의 89만 파운드의 지원에 힘입어 보들리 도서관이 승자가 되었다. 도서관 관계자는 “소중한 문학유산을 지켜내서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하면서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원고는 영국에 머물 것이며, 이번 가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과 닮은 꼴의 주인공 

‘더 왓슨’은 부유한 친척 왓슨 가에 막내딸로 입양된 후, 남편감 찾기에 혈안이 된 언니들로부터 끔직한 일들을 당하는 독립심이 강한 주인공 엠마 왓슨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제인 오스틴이 25살이던 1801년 아버지를 따라 바스(Bath)로 이주한 후, 1804년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고가 완성되지 못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05년 제인 오스틴의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처지가 소설의 주인공 엠마와 너무 비슷하게 된 사실과 오빠에 대한 부담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언니 카산드라와 함께 사우스 햄톤(South Hampton)의 갓 결혼한 다섯째 오빠 프랭크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고, 프랭크의 아내인 올케와의 불화와 불안정한 재정상태로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세 모녀는 어릴 때 부유한 귀족 친척에게 입양되어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셋째 오빠 에드워드에게 의지해서 살았다. 1809년 에드워드의 아내가 죽자, 세 모녀는 에드워드의 대저택이 있는 차톤(Chawton)으로 옮겨와 살았다. 제인이 만년에 글을 쓰면서 8년간 가족들과 지냈던 가옥은 에드워드의 대저택 차톤하우스 인근의 부속건물로서 에드워드가 마련해 준 집이다. 현재는 ‘제인 오스틴 하우스’라는 기념관이 되어있다. 이 시기에 은행가로서 발이 넓었던 넷째 오빠 헨리의 도움으로 1811년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출판하고, 이어서 ‘오만과 편견’ (1813년) , ‘맨스필드 공원’ (1814년), ‘엠마’ (1816년)을 출판했다. ‘노생거 사원’ 과 ‘설득’은 그녀가 죽은 후, 헨리와 카산드라가 유작을 모아 1817년 12월에 출판한 작품이다. 

작품활동에 몰두하던 제인 오스틴은 1816년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에디슨 병으로 급격히 체력을 상실한 제인은 마지막 몇 주간을 치료를 위해 윈체스터(Winchester)에서 지냈다. 죽음에 임박해서 오빠 에드워드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는 1817년 7월 18일 아침에 언니 카산드라의 품에 안겨 41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성직자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헨리의 주선으로, 그녀는 윈체스터 성당의 한 코너에 묻힐 수 있었다.

기념지를 둘러싼 지역간 갈등

차톤과 윈체스터가 속한 햄프셔(Hampshire)는 햄프셔를 제인 오스틴을 기념하는 으뜸 순례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로또 기금 50만 파운드를 지원받아 ‘제인 오스틴 하우스’ 기념관을 내부 수리하고 2009년에 교육센터를 개설했다. 지난 4월에는 윈체스터 성당에 ‘제인 오스틴 전시관’을 영구 개장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의 대표적 기념지로는 불과 5년간 머물렀던 바스가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실정이다. 바스에서는 눈에 띄는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바스가 전통 스타일 의상 비율이 세계최고라는 이점을 활용하여 바스에서 운영하는 ‘제인 오스틴 센터’와 ‘제인 오스틴 축제’는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햄프셔의 입장에서는 바스가 제인 오스틴 브랜드를 훔쳐갔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챠톤의 ‘제인 오스틴 하우스’의 루이스씨는 “여기가 그녀가 살면서 집필을 하던 곳인데 난감하다. 글을 쓰던 테이블, 침대 등 유품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불편한 심정을 나타냈다. 바스는 제인 오스틴의 사후에 출판된 ‘노생거 사원’이 바스의 사원을 모델로 한 바스 작품이라고 주장해 왔다. 실상은 바스로 이사오기 전에 작성한 ‘수잔’이라는 소설을 바스 거주 시기에 일부 개정했고, 사후에 ‘노생거 사원’ 개칭되어 출판된 것이다. 미완성 본이긴 하지만 ‘더 왓슨’ 만큼은 바스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바스의 ‘제인 오스틴 센타’의 뉴톤씨는 ‘더 왓슨’에 대해 “원고를 읽어보니 다른 작품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면서 “끝내지 않은 것이 정말 안타깝다”고 못내 아쉬운 심정을 나타냈다.  

감정이 불가능한 브랜드 가치

사후 200년이 지난 지금 제인 오스틴의 브랜드 가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영화, 드라마, 연극과 같은 대중문화 부문 외에도 패션, 관광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인 오스틴 시대인 1790-1850년의 의상과 액세서리를 지난 7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전시하고 있는 리버풀의 서들리 하우스에는 18세기 엠파이어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으려는 패션디자이너들과 관람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실제로 최근 들어 레트로 패션의 엠파이어룩이 새로운 트렌드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평민 출신으로 왕세자비가 된 케이트가 제인 오스텐과 먼 친척이라는 사실이 최근에 알려졌다. 15세기에 노섬벌랜드의 2대 백작이었던 헨리 퍼시가 제인 오스틴의 10대조이자 케이트의 16대조 할아버지로 밝혀진 것이다. 윌리엄 왕자부부가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로 묘사되면서, 제인 오스틴은 세익스피어에 이은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 브랜드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그 잠재된 무궁한 가치는 실로 감정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