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북무역 교두보 단둥 상인들
"새거 없습네까" 北 큰손 문전성시 한류(漢流)로 불리는 중국 바람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삶의 터전을 아예 중국으로 옮기는 개인과 기업이 늘고 있다. 과거 ‘아메리칸 드림’ 열풍은 ‘차이나 드림’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해 1633개 기업이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좌절감을 맛보기 일쑤다. 소자본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한 경우 특히 그렇다. 이에 중국 시장에 대한 심층기획 시리즈 ‘중국 시장을 여는 사람들’을 연재한다. 중국 시장의 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여는 한국인과 중국 시장에 대한 심층분석을 통해 소자본으로 차이나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조중우의교를 건너 신의주에 들어선 건물과 공장 굴뚝이 보인다. 얼마 전만 해도 밤이 되면 암흑으로 변했던 신의주의 밤은 최근 크게 밝아졌다. 북한에 개방의 기운이 일면서 압록강 끝자락에 단둥(丹東)에는 대북 교역에 나서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북한에 물건을 실어 나르는 남한 상인부터 중소기업인, 단둥∼신의주 변경무역을 중계하는 화상(華商)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최근 부쩍 바빠지고 있다. 인천항에서 단둥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보따리상도 크게 늘었다. 대흥상회의 정인철 사장. 그는 단둥에서 대북 거래를 한 지 5년이 됐다. 한국 교역상인이 모여 있는 단둥 최대 상권인 신류(新柳)와 얼마로(二馬路) 등지에는 북한의 큰손과 개인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정 사장은 “북한 대외거래의 30% 이상이 이곳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며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는 북한의 최대 교역로”라고 말했다. 이곳을 통해 컴퓨터 기자재와 tv, 전자레인지, dvd, 의약품, 신발, 의류, 타일, 과자 등 북한 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각종 물품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간다. 화공약품과 싱크대까지 반입된다.
단둥에서 물건을 조달하는 북한 사람은 중국으로 출장온 당 고위 간부부터 평양∼신의주를 오가는 화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그 중에도 주목되는 사람은 북한의 무역상. 단둥에는 특히 광명성, 봉화총국, 대성총국, 능라총국, 승진무역 등 북한 무역회사 임직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조달해 북한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조중우의교를 통해 단둥에서 신의주로 들어가는 물량은 하루 8∼10t 트럭 20대분이 넘는다. 이곳에서 산 물건은 평양 백화점에서 15∼30%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흥상회에도 이들이 찾아왔다. 깔끔한 양복을 입은 이들은 매장을 둘러본 후 “신발 모양새가 좀 지났습네다. 새 거 없습네까”라고 말했다. 매장에 진열된 물건의 질이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건만 그들은 신상품을 찾고 있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에야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 3000켤레를 주문했다. 물건을 북한으로 보내는 것은 단둥 상인 몫이다. 정 사장은 주문을 받은 뒤 직원들과 함께 밤샘작업에 들어갔다. 신발에 붙어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 라벨을 떼어내는 등 한국에서 만든 흔적을 모두 지우는 작업이 벌어졌다. 단둥에서 북한과 거래를 하는 한국인과 화교 상인은 적어도 5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평화시장으로 불리는 신류에서 이·얼·싼 마루 지역에 주로 모여 있다. 단둥을 드나드는 보따리상이 줄을 대는 곳도 이들 상인이다. 정 사장은 “단둥의 한국인이 고려와 조선 시대의 변경무역을 주도한 신의주 상인의 뒤를 잇고 있다”고 말했다. 단둥은 대북 거래를 중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북한 투자에 나서는 한국 기업인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북한으로 직접 들어갈 수 없는 남한 기업인은 화교와 재중 동포를 앞세워 이곳을 근거지로 대북투자에 나서고 있다. 투자하는 업종도 가지가지다. 신발, 의류, 라이터, 수건, 문방구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농산물 재배 등의 위탁생산까지 이뤄지고 있다. 단둥에서 농산물 합작법인을 경영하는 고철영 사장은 이곳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한국·일본·유럽으로 수출하고 있다. 그는 최근 들어 신의주에서 농산물을 시험재배하고 있다. 그는 “신의주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복숭아, 살구, 포도, 밤 할 것 없이 맛이 뛰어나다”며 “신의주∼단둥 지역이 농산물 수출의 전진기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4개의 경공업품 생산기지를 갖고 있는 정도환 사장도 “한국의 자본·기술이 북한의 노동력과 합쳐지면 남북한은 어느 지역보다 강한 경쟁력을 가진 윈윈게임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 인력의 질이 중국보다 월등히 우수하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북한에 투자한 기업이 전기공을 필요로 하면 북한은 전문적인 전기기술자를 보내고 있다”며 “국내보다 싼값에 우수한 노동력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 대북 투자의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대북 사업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직도 ‘머나 먼 땅’이다.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기 때문이다. 위탁을 받은 북한 쪽 파트너가 무슨 생각을 하고, 북한 내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알기 힘들다. 북한 쪽 파트너를 잘못 만나는 날이면 빈손 털고 나오기 다반사다. 대북 무역거래를 하는 박성덕 사장은 “북한에 투자하는 사람 10명 중 7∼8명이 손해를 보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이런 장벽 때문”이라고 말했다. 단둥=강호원특파원/hkang@segye.com 김정일 中방문후 개발 활기…"가자, 신의주로" 상인들 단꿈 ■ 기지개켜는 신의주특구 중국 단둥을 근거지로 북한과 거래하는 한국인은 북한의 문이 열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북한이 최근 신의주특구 건설에 나설 움직임을 다시 보이면서 이들은 단꿈에 젖어 있다. 단둥한국인회의 정병철 사무국장은 “신의주특구는 통일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지만, 단둥 한인에게는 단둥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북한의 신의주특구 건설계획은 초대 장관에 임명됐던 양빈(楊斌) 어우야(歐亞)그룹 회장이 2002년 10월 중국 당국에 의해 구속된 이후 2년째 동면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나 최근 신의주특구 재추진의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양빈 회장이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북한이 신의주특구의 새 장관에 사르샹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풀러턴시장을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가 신의주특구 운영을 담당하는 부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의 전조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4월말 중국을 방문하고 나서부터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중국이 그동안 반대해온 신의주특구 개발을 묵인하기 시작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민경협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민경협은 남한 기업과의 접촉 창구다. 그런 만큼 북한이 신의주특구 건설을 위해 한국 기업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경제 재건에 들어가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개성공단 가동에 때맞춰 신의주특구가 전면에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뿌리 내리는 한국요리
'갈비' 앞세워 베이징시장 당당히 입성 ◇베이징 둥싼환(東三環) 지역에 있는 베이루(北路) 중국 식당가. 중국에 진출한 한국요리는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이들 중국요리점의 장벽을 뛰어넘고 있다.<사진위> 한국 식당이 모여 있는 베이징 왕징(望京)의 ‘한국성’. 이곳에는 한인을 상대로 하는 크고 작은 식당과 가게가 성업 중이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다.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 광장 서남쪽에는 중국과 북한의 경호요원이 깔렸다. 그 사이를 뚫고 김 위원장이 중국요리점인 취안쥐더(全聚德)에 들어섰다. 이곳은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할 당시 식사한 곳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 속에서 짬을 내 대를 이어 취안쥐더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취안쥐더는 베이징 요리의 대명사인 카오야(페킹덕)로 이름난 음식점이다. 카오야란 오리구이 요리로 그 껍질을 밀가루로 만든 피로 싸먹는 맛이 별미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중국에 원나라를 세운 이후 ‘황제의 도시’로 800년 이상 전통을 지닌 베이징인지라 중국인은 ‘베이징 요리는 세계 최고의 요리’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베이징 요리를 대표하는 카오야의 최고 브랜드가 취안쥐더다. ◆카오야의 벽을 뛰어넘어=한중 수교 15년째, 한국요리가 카오야의 벽을 뛰어넘기에 나서고 있다. 카오야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는 베이징의 요리 시장에는 ‘갈비’를 앞세운 한국요리가 고급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베이징에는 접대 문화가 유난히 발달해 있다. 그런 베이징이지만 한국요리를 대접받은 중국인은 거의 예외 없이 ‘대접 한번 잘 받았다’는 말을 한다. 한국의 맛이 중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베이징의 한국 음식점은 400곳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이징에 상주하는 한국인도 5만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들 한국 음식점은 한국인만을 상대하지 않는다. 고급 한국 음식점일수록 특히 그렇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중국요리에 맞서 한국요리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기적이다. 베이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최고급 백화점인 옌사(燕莎). 베이징에서 물건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곳이다. 이 백화점의 지하에도 한국요리점인 ‘서라벌’이 들어서 있다. 홀 면적이 1000평에 가깝다. 그러나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 잡기가 힘들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손님 10명 중 7명 이상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이다. 갈비와 등심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밑반찬으로 각종 김치가 나오지만, 중국인 손님은 신비한 맛을 감상이라도 하듯 정성스럽게 젓가락을 움직인다. 요리도 브랜드 시대다. 서라벌이 중국인으로 발 디딜 틈 없게 된 데에는 한국요리점의 브랜드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서라벌의 중국 경영을 도맡았던 백금식 사장은 “중국에 진출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에야 중국인이 한국의 맛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1990년 초만 해도 옌사와 량마허(亮馬河)에만 있던 서라벌이 왕푸징(王府井)과 시단(西單) 진위다샤(金玉大厦), 왕징(望京), 팡좡(方莊) 등 9곳으로 늘어났다. 베이징 이외에도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다롄(大連), 선양(瀋陽), 창춘(長春) 등에 체인점이 들어섰다.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조차 찾아보기 힘든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의 후허하오터(呼和好特) 중심가에도 서라벌의 간판이 내걸려 있다.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에 있는 한국 음식점은 900곳. 그러나 칭다오시 대외사업처의 리빈(李濱) 처장은 “칭다오에도 서라벌과 같은 곳을 끌어들일 수 없느냐”고 말했다. 요리도 요리지만 중국인의 가슴 깊이 새겨진 브랜드의 힘이 낳은 결과다. 서라벌뿐만이 아니다. 두산이 투자한 수복성과 수원갈비 전문점인 화춘옥도 중국 시장에 웅지를 튼 한국요리 브랜드다. 수복성은 중국 내 83개 뿐인 국가 특급식당 중 한 곳이다. 수복성이 중국에 진출한 것은 12년 전인 1993년. 한국의 대형 식당이 금융 위기를 맞아 하나둘씩 철수하는 속에서도 끝까지 버틴 수복성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까지 식사하고 갔다. 지금도 중국의 내로라하는 고위 인사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수복성은 지난 7월 베이징 여인가 주변에 최고급 호텔식당을 뺨칠 정도의 고급 한국요리 2호점을 열었다. 3대에 걸쳐 60년 동안 수원에서 수원갈비를 만들어온 화춘옥도 중국에 진출해 맛 경쟁에 나서고 있다. 지난 4월 톈진(天津)에 2호점을 내고 시장 확장에 뛰어들었다. ◆문턱 높은 중국 시장=중국 내 한국식당이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만은 아니다. 실패의 쓴 잔을 마신 곳도 부지기수다. 1990대 중반 중국에 진출한 진로주가와 보배원, 고려원 등 대형 한국 음식점은 대부분 금융위기 이후 문을 닫았다. 작은 한국 음식점의 부침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왕징 부근에도 텅 빈 자리를 지키는 식당이 한두 곳이 아니다. 중국 시장의 문턱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한국 요리의 최대 맹점은 메뉴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베이징 요리는 제쳐두고라도 광둥(廣東)·쓰촨(四川)·상하이(上海) 요리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중국요리점의 메뉴판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요리가 올라 있다. 서라벌의 백금식 사장은 “음식 종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최대 난제”라고 말했다. 누구에게 음식을 팔 것이냐도 문제다. 화춘옥의 이광일 사장은 “중국에서는 한국인을 상대로 음식 장사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외식 문화가 발달한 만큼 중국인을 외면하고서는 중국에서 돈벌기는 애초부터 물 건너간다는 뜻이다. 신용도 최고 덕목 중 하나다. 수복성의 온대성 사장은 “ 중국에서는 신용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며 “고기 한 점이라도 속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고급 한국식당이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수복성은 푸싱(福星)과 화안(華安)이라는 중국 국영기업체로부터 한 근에 150위안짜리 소고기만 사 쓰고 있다. 일반 시장에서 파는 고기 값보다 15배나 비싼 가격이다. ‘카오야의 벽’은 높지만 벽을 뛰어넘기 위한 도전은 계속될 전망이다 <3>미용도 한류바람 이가자·전덕현등 유명체인 잇단 진출
베이징 거리를 걷자면 ‘한국미발 한국미용(韓國美髮 韓國美容)’이라고 적힌 간판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한두 곳 생기기 시작한 이 간판은 이제 동네마다 없는 곳이 없다. 베이징에 모여든 한국인이 거주하는 변두리에서 베이징의 중심가에 이르기까지 ‘한국’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미용실이 판을 친다. 베이징의 우다오커우(五道口) 거리. 이곳은 베이징대학, 칭화(淸華)대학, 어언문화대학 등 내로라하는 중국의 대학이 모인 대학가다. 이 지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은 지난해에만 7500여명, 올해에는 1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도 한국 미용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한국인이 세운 미용실에서 재중 동포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용’이라는 간판을 내건 곳이 10여곳에 이른다. 우다오커우뿐만 아니다. 한국인이 많은 왕징(望京)과 야윈춘(亞運村), 베이징의 중심가인 왕푸징(王府井) 인근 지역에도 어김없이 한국미용 바람이 불고 있다. 재일동포 미용실을 포함해 한국 미용기술을 내세워 문을 연 곳은 베이징에만 100곳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류의 한복판에 선 미용=중국에 상륙한 한국문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미용만큼 한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업종도 드물다. 잘살게 되면 멋을 내기 마련이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20년이 넘도록 고도 경제성장을 하는 동안 멋 내지 않기로 유명한 중국인의 습관이 바뀌고 있다. 베이징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 안팎에 이른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은 한국인에 못지않다. 이런 상황이 한국인이 중국 미용시장을 뚫고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있다. ‘이가자 미용실’을 운영하는 이규상 사장은 “1980년대 이후 중국 본토에 상륙한 홍콩의 대형 미용실은 조만간 한국 자본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한국의 미용산업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부터다. 이때 우다오커우의 시자오(西郊)호텔에 ‘한국 미용실’이 들어섰다. 당시만
그러나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 붐이 일고 한국의 tv 연속극이 중국 가정에 파고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베이징의 동북지역인 신위안리(新源里)에 유학생이 모여 만든 옌한(燕漢)이라는 미용실이 문을 열었다. 이 지역은 술집과 젊은 여성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미의 열풍은 여성을 통해 번지게 마련이다. 베이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국내 미용 브랜드인 ‘이가자 미용실’이 중국에 진출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 한국의 미용 바람이 중국 젊은 여성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규상 사장은 “중국 여성이 몰려들 때에는 미용사들이 하루 12시간을 꼬박 서서 손님을 맞아야 했다”고 말했다.
◆대기업도 진출 타진=중국 내 한국 미용산업의 갈 길은 아직 멀다. 대규모 자본을 앞세워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대도시를 초토화시키는 홍콩 미용자본과는 달리 한국의 미용업체는 아직 소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밑천이 없으면 구멍가게밖에 할 수 없다. 중국에서 한국미용 바람이 불고 있지만 국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덕현 미용실의 전덕현 사장은 “바로 이 점이 중국 시장에서 뛰어드는 한국미용산업의 한계”라고 말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지난 춘제(春節·설날) 때였다. 원본 기사 보기:pluskorea <저작권자 ⓒ London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