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소자 투표권, 영국의 유럽이탈 뇌관이 되나?

김지호 | 입력 : 2012/12/25 [13:34]
시민들의 인권과 참정권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형을 받고 복역 중인 재소자들에 대한 인권과 참정권에 대해 영국과 유럽의 시각이 서로 부딪히면서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2005년 프랑스 스트라즈부그에 소재한 유럽인권법정(ECHR)은 영국의 도끼 살인자 존 허스트가 제기한 소송에서 재소자들에 대한 투표권 전면 박탈이 인권을 침해하는 불법이라고 판결하고 시정명령을 내렸었다. 법정은 각국은 어떤 재소자들에 대해 참정권을 박탈할 것인지에 대한 선별적 제한 결정은 허용했었다. 그에 따라 영국 정부는 재소자들에게 선별적으로 선거권을 부여하는 선거법 개정을 검토해왔다. 그러나 지난 2월 영국하원은 압도적인 표결로 현재와 같은 재소자에 대한 선거권 박탈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지난 5월 유럽인권법정은 11월까지 개정할 것을 재차 명령하면서, 그때까지 개정을 하지 않으면 그로 인한 손해를 영국정부가 해당 당사자에게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법정의 판결에 반발하는 영국 

하지만 최근 캐머런 총리가 법개정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유럽법정의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의회에서 “영국은 수감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라는 유럽인권법정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정부에서는 수감자들이 투표권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말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그의 각료인 도미닉 그리브 법무자문이 “총리의 처신에 격노한다”며 강력 반발했다. 그는 “스트라즈부그의 판결에 따르지 않으면 영국의 평판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캐머런 총리가 이를 전면 거부한 것이다. 그리브 법무자문은 또 “영국이 투표권 부여를 거부한다면 재소자들에게 수천만 파운드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유럽인권법정이 판결할 것이 확실하다. 영국이 지불을 거부하면 추가적인 의무 위반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오히려 여야를 막론하고 대다수 의원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이들은 “러시아나 터키와 같은 명백한 인권 침해국에 대해서는 멤버십을 중지하지 하지 못하면서 영국에 제제를 가한다면 넌센스”라며, “영국의 역사적인 재소자의 투표 금지를 유지하기 위해 하원에서 압도적으로 표결했다. 스트라즈부그는 영국 의회의 자주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그리브 법무자문은 유럽인권법정을 설득할 수 있도록 경미한 형량을 받은 최소한의 수감자에 대해 선거권을 주자고 제안하기도 했었으나, 재소자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는 140년간 이어온 원칙을 깨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보수당의 필립 홀로본 의원은 “영국 의회는 1870년에 이 원칙에 대해 입장을 정리했고, 이는 유럽인권법정이 설립되기 75년 전”이라고 반박했다.

투표권 제한은 인권과 무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영국인들이 고집스러우리만큼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는 권리는 행사할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권과는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432년에 처음으로 허락된 투표권은 국가에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에게만 주어졌다. 당시에는 상당히 큰 규모인 40실링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남자로 한정됐었다. 이후 여러 차례 법개정을 통해 투표권이 확대되었고 1928년에야 재산유무에 상관 없이 남녀가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대학에 소속된 사람은 1표 이상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현재와 같이 1인 1표제가 확립된 것은 1948년이다. 나이 제한은 2006년에 21세에서 18세로 낮춰졌다. 참정권을 확대하면서 입법자들의 가장 큰 우려는 국가 운영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거나 책임의식이 결여된 사람들의 투표로 인한 국정의 왜곡이었다. 따라서 미성년이나 재소자와 같은 반사회적인 사람들에 대한 투표권 제한은 인권과는 무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시각이다. 따라서 유럽인권법정에서 인권침해라는 이유로 재소자에게 투표권을 주라고 하는 것은 영국인들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이다.

자주권 사수를 위한 영국의 옵션은?

캐머런 총리는 투표 전 “재소자의 투표에 구역질 난다”며 강한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또,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장관은 “영국의회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유럽의 판결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며 총리의 입장을 두둔해왔다. 노동당도 “유럽법정은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영국의 입장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며 초당적인 공조자세를 취해왔다. 보수당의 피터 본 의원은 “지난 2월 사상 처음으로 영국의사당의 결정이 유럽법정의 판결을 뒤엎은 바 있다”며, “영국인들은, 미키마우스 같은 유럽법정을 무시하고, 영국의사당이 최고이기를 원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유럽인권법정으로부터 11월 25일까지 재소자 투표권부여에 대한 법 개정을 명령 받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장관은 마지 못해 지난 달 22일 개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수감자에 대한 투표권을 현재와 같은 전면 박탈, 6개월 이하, 4년 이하의 형을 받은 제소자에게 부여하는 3개 안 중에서 택일하는 안이다. 영국 정부의 속셈은 안건의 표결을 최대한 지연시켜 2015년 총선 이후로 미루어 보겠다는 것이지만, 유럽인권법정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또한, 이로 인해 영국이 감당해야 할 과제는 결코 녹녹하지 않아 보인다. 지금 현재 500명의 재소자로부터 투표권 박탈에 대한 소송이 걸려 있는 상황이고, 앞으로 배상금의 규모가 1억 파운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영국은 유럽인권 법정의 멤버십을 포기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지만, UN을 비롯한 여러 국제협약들이 유럽인권법에 기초하고 있어 영국이 유럽에 남아 있는 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유럽과의 갈등이 고조되면 영국의 탈 유럽 움직임이 가속화 될 우려가 있다. 어쩌면 영국은 내심 유럽과의 결별을 각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런던타임즈 www.londontimes.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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