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본 대륙백제의 역사는?

<고구려사초.략>의 백제 기록과 <삼국사기>를 비교해 본 백제사는?
성훈 칼럼니스트 | 입력 : 2008/11/11 [18:47]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유난히 정변(쿠데타)이 자주 일어난 국가였다. 그 이유를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백제는 온조백제계와 비류백제계의 두 체제가 공존한 일국이체제의 나라로 온조계와 비류계가 항상 왕권을 놓고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시조인 온조대왕이 형인 비류대왕을 죽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료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원래 왕통이란 아버지(부왕)로부터 아들(태자)로 넘어가면 정변이란 것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 태자가 나타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뺏는 경우는 있으나 그런 패륜은 적장자인 경우에 있을 수 없고, 서자 출신이 적통을 제치고 왕이 되려고 할 때 간혹 이런 패륜이 있을 수는 있다.

백제는 시조 온조대왕의 건국 후 2대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 초고왕--> 6대 구수왕까지는 왕통이 부자승계로 순조로이 이어져 즉 정치가 안정되어 나라의 기반을 확실히 다지게 된다. 온조대왕 ~ 구수왕 사이에 정변이 있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사초.략>에는, “a.d 97년 백제에서는 용 둘이 한수에 나타났다고 한다. 사욱의 아들 계산이 사만을 죽이고 보위에 섰고 응묵은 막북으로 도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서는 “기루왕 21년(ad 97년) 용 두마리가 한강에 나타났다”는 기록 이외에는 쿠데타가 일어나 보위가 바뀌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두 기록 중 어는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고이왕에 의한 쿠데타

초고왕의 맏아들인 6대 구수왕이 죽자 왕위가 구수왕의 아들에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초고왕의 동생인 고이왕에게로 넘어간다. <고구려사초.략>에는 “a.d 234년 백제의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죽고 그의 아들 <사반>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올랐더니, 초고왕의 동생 고이가 사반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보위에 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구수왕의 맏아들 사반이 위를 계승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를 해 나갈 수 없으므로 초고왕의 동모제인 고이가 즉위했다.”고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여 백제에서 왕위를 두고 뭔가 쿠데타(정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첫 쿠데타로 보인다. 구수왕의 아들인 7대 사반왕은 왕위에는 잠시 있었으나 일찍 축출 당하여 기록이 없다. 

비류왕의 등극은 어떻게?

이어 8대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으로 부자승계가 이어지다가 10대 분서왕 다음에는 구수왕의 2자인 비류왕이 즉위하게 된다. 분서왕의 죽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분서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죽었고, 분서왕이 죽자 비록 아들(나중에 계왕)이 있었으나 모두 어리어 대를 잇게 할 수가 없어 비류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사초.략>에서는, a.d 304년 분서왕이 낙랑의 서도를 습격해 파하고 군으로 만들자, 낙랑왕의 신하인 자객이 여장을 하고 분서를 알현하니 분서왕이 그 미모에 빠져 수레 안으로 불러들이자 자객이 분서왕을 칼로 죽였고, 분서왕의 모후인 보과는 자신의 정부인 비류를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둘 다 비슷한 기록이나 11대 비류왕의 등극 과정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대왕은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a.d 344년 비류왕이 재위 41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분서왕의 아들인 계왕이 왕으로 즉위한다. 당초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이 어리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가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자 계왕이 12대 왕으로 즉위하고, 계왕은 재위 3년 만에 죽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즉위하는데 <고구려사초.략>과 <삼국사기>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 철저한 식민사관으로 그려진 교과서의 근초고왕 때의 백제영토.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의 저자인 김성호선생은 온조계 근초고왕이 비류계 계왕을 죽이는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하며, 이 계왕의 손자가 왜로 도망가 왜왕 응신이 된다는 이론을 편 적이 있다. 또한 백제는 온조계와 비류계가 서로 왕위를 두고 싸우고 서로를 죽이는 정변이 삼국 중 가장 많았다고 한다.

김성호선생은 계왕을 비류계로 보았으니 백제왕실의 혈통으로 보았을 때 10대 분서왕, 9대 책계왕, 8대 고이왕을 비류계로 본 것이다.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모제이니 고이왕과 초고왕의 부친이 서로 다르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기록상 초고왕의 고조부가 온조대왕이기 때문이다. 고이왕의 부친이 비류계이어야 이 이론이 성립하는데, 현재의 기록으로서는 그것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

여하튼 근초고대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연 영웅으로 대륙의 요서와 진평에 백제군을 설립하는 등 백제의 강역을 최대한 넓히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막강한 제왕이었다. 그런 근초고대왕의 위업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한반도에서 대륙에 진출하여 무역기지를 세웠다고 하며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위업을 축소시키고 있는 중이다. 

▲  위 지도는 최전성기인 백제 동성대왕 때의 영토로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의 영토도 거의 같을 것이다. 예로부터 요는 산서성 태행산맥 내의 있는 지명으로 서쪽 산악지대를 요서, 동부 평야지대를 요동이라 한다. 중국에서 요동이라 함은 현 하북성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진사왕은 조카 아신의 왕위를 빼앗았나?

13대 근초고대왕 이후 왕통은 아들인 14대 근구수왕과 아들인 15대 침류왕으로 이어진다.  a.d 385년 침류왕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침류왕의 아우인 진사왕이 즉위하게 된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진사는 강하고 용맹하고 총기 있고 지혜로웠으며 지략도 있었다. 침류왕의 부인이 시동생인 진사를 매우 좋아 하여서 새 남편으로 삼더니 정사를 독차지하였고 자신의 아들 아신을 후사로 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이 죽으니 태자가 어리므로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사왕은 관미성이 광개토태왕에게 함락 당할 때 처인 가리와 함께 사냥하며 열흘 여를 지내면서 고구려가 물러나길 기다리다가 관미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서 자빠지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이에 가리가 침류의 아들인 아신을 보위에 오르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의 저자인 김성호선생은 왜에 있던 태자 아신(침류왕의 아들)이 비류계 계왕의 손자인 왜왕 응신과 결탁하여 숙부인 진사왕을 공격하고 진사왕은 고구려 광개토태왕에게 구원(s.o.s)을 청하고 자신은 사냥을 하던 중 죽었고 아신왕이 숙부인 진사에게 빼앗긴 왕위를 다시 찾는다는 이론을 편 적이 있다.

또한 김성호선생은 해양대제국 백제와 왜의 관계를 기막히게 묘사하면서, 그 백제의 대방을 황해도로 비정해 망국의 반도(식민)사관을 인정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만일 김성호선생의 이론적 무대가 역사적 사실처럼 대륙의 동부였다면 최고의 이론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못하여 가설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  덕흥리 고분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은 고구려 고국원왕~광개토태왕 시절의 각료였다. 그의 무덤에 그려진 13태수가 하례를 올리는 벽화의 지명을 표시한 지도이다. 그 아래 산동반도가 백제의 영역이었다. 백제 아신왕과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무대는 대륙 동부 평야지대이다.  


아신왕의 막내아우에 의한 실패한 쿠데타

17대 아신왕이 죽자 이를 숨기고 발상하지 않은 채 아신왕의 둘째 아우가 정사를 대행하며 태자의 환국을 기다리는데 아신왕의 막내아우 설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전지왕은 왜국에서 온 호위병과 함께 섬에서 기다린다. 나라사람들이 막내아우를 죽이고 전지왕을 맞아들인다고 두 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아신왕의 막내아우인 설례의 실패한 쿠데타였다.

왜에 가있던 전지왕의 부인은 왜왕 인덕의 딸인 팔수부인으로 섬 중에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분이 구이신왕이라고  <고구려사초.략>은 <삼국사기>에 없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19대 구이신왕이 죽고 20대 비유왕이 즉위한다.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 또는 전지왕의 서자라고 하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사초.략>에서는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장자라고 못 박고 있다.

고구려 군에게 처형당하는 비운의 개로왕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비유왕 29년 봄 3월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흑룡(黑龍)이 한산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둡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맏아들 개로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서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장수대제 23년(455년) 기사에 장수제가 미천릉에 갔다가 거기서 가까운 <한산> 땅에서 사냥하고 있는 백제의 비유왕을 사로잡자는 신하의 제안에 장수제가 답하는 말 중의 일부분이다.

“비유는 전지가 제 며느리와 통해 낳은 자식이고, 개로는 비유가 해수의 처와 붙어서 난 자식이었는데, 비유의 처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서 개로를 데려다 길렀다. 비유가 여러 여자와 사통해 여러 아들을 두었다. 모두가 귀여움을 받더니만 서로 후사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에 비유의 처가 비유를 해치우고 개로를 세운 것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개로왕은 갑자기 죽은 비유왕의 장자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고, 개로왕의 양어머니가 친아버지(비유왕)를 죽이고 개로왕을 보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의 “흑룡(黑龍)이 한산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둡더니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는 기록은 고구려사초.략의 기록대로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21대 개로왕은 재위 중 바둑 고수로 위장한 고구려의 첩자 도림의 “(전략) 성곽도 수축하지 않고, 궁실도 꾸미지 않고 ...(중략)... 백성의 집들도 자주 강물에 무너지고 있으니...(후략)”라는 말에 현혹되어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킨다.

개로왕은 국민을 모두 동원시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굉장하고 화려하게 궁전을 짓는다. “하수(河水)를 따라 제방을 쌓는데 사성(蛇城)의 동에서 숭산(嵩山)의 북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 하수는 바로 황하를 의미하며, 숭산은 바로 무술로 유명한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이거나 산동성 숭산이지 서울 한강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백제 개로왕이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숭산은 소림사가 있는 하남성 숭산이다.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으니 백제의 국고가 고갈된 것이고, 평야지대이다 보니 돌이 귀해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은 것이다.


최근 민족사학에 관심이 있는 일부 네티즌들이 숭산은 하남성 숭산이 아니라 산동성 숭산이라는 이론을 펼치고 있으나, 우선 산동성 숭산은 그 위치가 황하와 떨어진 곳이고 또한 작은 황하의 지류가 근처에 흐르고 있어 창고가 텅 빌 정도의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킬만한 이유가 없고 규모도 안되는 곳이다.

하남성 숭산은 정주(鄭州) 서쪽으로 낙양과 가깝게 있어 황하의 물줄기가 동부평야지대로 나오면서 자주 바뀌는 시발점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바다로 본 대야택으로 흘러 들어오는 황하의 물줄기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았다고 보아야 그 이치에 맞기 때문에 개로왕이 쌓은 제방은 서쪽 끝은 하남성 숭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므로 산동성 숭산에 대해서는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식민사학계는 한성을 현 서울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서울은 자주 강물에 무너지지도 않으며, 또 성을 쌓더라도 돌을 쌓아 축성하지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을 지역이 아닌 것이다. 흙을 구워 벽돌로 축성을 하는 지역은 산이 없어 돌이 귀한 지역이며, 평야지대로 퇴적물이 많이 쌓이는 지역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돌이 귀한 지역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헛소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고구려의 장군 걸루는 개로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하고는 왕의 면상을 향해 침을 세 번 뱉고 꽁꽁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아차성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아차산(峨嵯山)이 아니라 산동성에 있었던 백제의 수도 근처에 있는 산으로 보아야 한다.

아차산성이 구리시에 있다 하면서 고구려의 도시를 표방하는 구리시청은 우선 제대로 된 고구려의 역사부터 배워야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이 처형당한 아차성(阿且城>을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아단성(阿旦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두 글자가 너무도 비슷해 분명 어느 하나는 오기일 것으로 본다. 

▲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사이에 걸쳐있는 아차산. 구리시는 아차산이 있다는 이유로 구리시가 고구려 도시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서에 나와 있는 고구려 아차산은 대륙에 있다는 역사적 사실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 역시 전 국민을 속이고 있는 식민사학계의 작품이다.
 

해구의 쿠데타로 죽은 문주왕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들 문주가 왕위를 계승하고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약간 다르게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475년 5월 고구려가 백제의 50여 성을 점령하니 문주가 자비에게로 도망을 쳤다. 10월 자비가 웅진의 땅을 문주에게 빌려주어 남은 무리를 수습하게 하였다. 그러자 장수제가  “유비가 형주를 빌리더니만 오와 서로 다투었소. 자비는 필시 문주에게 잠식당할 것이오.”라 말한다.

문주왕의 처 해씨는 혼인하기 이전부터 문주왕의 종형인 해구라는 자와 상통해왔고 정사를 함부로 주물렀다. 자신이 외톨이임을 알게 된 문주왕은 동생인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아들인 삼근(三斤)을 적윤으로 삼는다. 477년 7월 해씨는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를 독살한다.

9월 문주왕이 사냥을 나가자 해구가 자신의 심복들을 시켜서 문주왕을 죽이나 자신이 보위에 오르지는 못하고 13살이던 삼근태자를 왕으로 세운다. 해구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직접 왕이 되는 대신에 자신의 딸을 삼근왕의 왕비로 보내고 모든 정사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478년 봄 좌평 해구가 연신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반역하였다. 삼근왕은 좌평 진남을 시켜 군사 2,000을 가느리고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다시 진로를 시켜 정병 500을 거느리고 해구를 격살케 하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였다. 그리고는 478년 11월 삼근왕이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사초.략>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나 약간 다르다. 진남이 위졸 2,500을 이끌고 쳤다.  진남의 조카인 진로가 날쌘 자 5인을 골라 수로(水路)로 성을 깨고 돌입하여 해구를 사로잡아 베어 죽였고, 연신의 처자를 저잣거리에서 찢어 죽였고 해구의 처는 내응해서 공을 세웠다하여 국대부인을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삼근왕의 즉위와 동성대왕의 등극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근왕은 곤지의 처 진선을 첩으로 삼고, 곤지의 아들로 한살 아래인 모대(동성대왕)를 아들로 삼았다. 479년 11월 동성대왕은 즉위하고 나서 삼근왕이 죽었음을 세상에 알린다. 해구의 처와 딸 모두는 삼근왕이 언제 죽었는지를 몰랐다. 동성왕은 삼근왕을 섬겼던 해구의 딸을 처로 맞아들인다고 기록함으로서 당시 뭔가 정변(쿠데타)이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동성대왕과 무령대왕의 죽음

중국 남북조시대의 강자인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수차례 무참히 격파하고 대륙의 동부 평야지대를 모두 차지해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룬 동성대왕은 위사좌평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라고 명한다. 그러나 백가는 가기를 싫어하여 병을 핑계로 사직하니 동성대왕이 허락지 않았다.

이로써 왕을 원망하더니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찌르게 하여 동성대왕이 죽고 무령대왕이 뒤를 이어 즉위한다. 대왕을 시해한 백가는 가림성을 점령하고 반역하므로 무령대왕이 토벌히니 백가가 항복하고 대왕은 백가를 베어 백강에 던졌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백가가 동성대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무령대왕에게 제압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큰 영웅인 백제의 동성대왕은 젊은 나이에 이렇듯 허망하게 부하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은 동성대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장수대제 다음 황제인 문자명제의 기록이 없어 이 <삼국사기>의 내용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  남북조시대의 최강국 북위의 수십만 기병은 동성대왕에게 무참히 패배한다. 남제서에 강시단야(피가 강이 되고 시체가 쌓여 들을 덮었다)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최강국 북위는 동부평야지대로 나오지 못하고 산악지대인 산서성 대동시에서 하남성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동성대왕이 임명한 7태수의 지명으로 보면 대륙동부평야지대는 백제의 강역이었다.


<일본서기>는 신빙성이 의심되는 사서이기는 하나, 백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많은 편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의 혈연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을 간략히 기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삼근왕이 죽자 당시 왜에 있던 곤지의 5왕자 중 둘째 왕자인 말다(末多)가 젊고 총명함으로 백제의 왕(동성왕)이 되어 왜로부터 귀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을 인용해 무령왕의 출생을 기록하고 있는데, 간단히 말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개로왕의 아들인 곤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25세 무열천황 4년 백제의 말다왕(동성왕)이 무도하여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이 제거하고 도인(島人섬사람)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휘는 사마(斯麻)왕이고,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복형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島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동성)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라는 기록이다.

여하튼 의혹이 많으나 공주의 무령왕릉의 지석에 나와 있는 무령왕의 나이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성대왕의 나이를 비교해 볼 때 무령대왕이 동성대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결정적인 사서의 증거가 하나 있다.

중국사서 중 남북조시대의 남조였던 송나라의 사서인 송서(宋書)의 기록으로, 478년 왜왕 무(武)가 송 순제에게 바친 상표문의 내용으로 인해 무령대왕은 개로왕의 친자임이 밝혀진다. 상표문의 내용인 “갑자기 닥쳐온 자신의 부형(父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喪)을 입게 되어 대군의 출동도 중지하고 긴 세월을 상중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의 부형(父兄)은 475년 겨울 고구려 장수대제의 대군에게 7일간의 공격 끝에 한성이 함락당하고 붙잡혀 처형당한 백제의 개로왕과 왕자들이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무령대왕은 동성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후 백제의 중흥기를 이어간다. 그런 무령대왕의 릉이 한반도 공주에게 발견됨으로서, 식민사학계는 충청도 전라도 땅은 백제의 강역이라는 반도사관을 기정사실화 해버리는데 결정적인 증거로 철저히 이용한다. 그러나 무령대왕은 정상적으로 죽지 않고 독살당해 시신이 한반도 공주로 옮겨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의 안원대제 5년(523년) 기록에 따르면,
사마(무령대왕)의 처 연씨가 사오의 처 백씨를 투기하다가 사마를 독살하였고, 사마의 서자 명농(성왕)은 상을 당한 것을 숨기고 보위에 올랐다. 상이 사마가 제삿날에 사냥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명농이 과연 아비 죽인 것을 숨겼다. (斯摩妻燕氏, 妬沙烏妻苩氏, 毒殺斯摩. 斯摩庻子明穠秘其喪而自立. 上悪斯摩祭日出獵, 明穠果秘其殺父.)

위 기록에 따르면 사마왕은 부인에게 독살을 당하고, 아들인 성왕이 아버지가 죽은 것을 숨기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패륜을 계속 숨기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무령왕은 독살당한 후 그의 죽음을 감추기 위해 측근들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무령왕이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인 한반도로 옮겨져 남의 나라 사람의 손으로 장례를 지내다보니 감히 대왕의 이름인 사마(斯麻)를 지석에 함부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부왕이 정상적으로 죽었다면 지석에 존호인 무령왕을 안 쓰고 이름(휘)인 사마를 함부로 쓸 자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내용대로라면 무령왕이 한반도에 묻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 대왕의 존호가 아닌 휘(이름)인 사마로 적혀 있고, 돈을 주고 땅을 사서 소유권을 확실히 한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무령대왕은 독살당한 후 남의 나라 땅에 묻힌 것이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이후 백제의 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령대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32년(554년) 신라와의 전투에서 해를 입어 죽었다고 하며, 후의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사유가 확실치 않다. 게다가 <고구려사초.략>의 기록도 23대 안원대제 15년(545년)까지의 기록 밖에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일본서기>와 (백제신찬>에 의해 백제 성왕이 왜왕이 되었다는 이론도 있다. 좀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보이나 충분히 일리 있는 이론으로 본다. 백제는 전성기를 연 근초고대왕 이후로 대륙에 남부에 있었던 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신왕, 전지왕, 그리고 개로왕의 아들인 곤지왕자, 동성대왕, 무령대왕, 의자왕 등은 일본의 전신인 왜왕실과 아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  일본의 법륭사에 있는 비밀문서인 성예초에는 백제 성왕이 왜왕을 겸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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