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거목..'후광 김대중의 일생' -1

후광은 1925년 생이 아닌 1924년 1월 6일생
런던타임즈 LONDONTIMES | 입력 : 2009/08/19 [06:19]
조종안
편집부 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늘 오후 1시 43분경 지병으로 서거하셨습니다. 먼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인간 김대중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추모특집으로 후광 김대중의 일생이라는 특집기사를 2편 연속으로 마련했습니다. 집필은 본지 편집위원이자 김대중 전 대통령 팬 카페인 '후광 김대중마을' 카페지기인 조종안님 이십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후광 김대중(後廣 金大中) 전 대통령을 1925년(乙丑)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1924년(癸亥)1월 6일생이다. 후광은 농토마저 일제(日帝)에게 빼앗기고 굶주리던 시절,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으로 농사를 짓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사이에서 네 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후광이 태어나기 전 어머님이 천신(天神)을 보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한다.
 
태어난 곳은 목포에서 34km떨어진 한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섬 하의도이다. 섬이 연화만개(蓮花滿開)형태라 하여 연꽃을 상징하는 荷와, 낮고 평탄한 산들은 섬이 옷을 입은 것 같다 하여 옷 依를 써서 하의도(荷依島)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이다. 그래서 ‘후광’(後廣)이란 아호도 태어난 마을이름을 따랐다고 한다.
 
고희(古稀)를 5년이나 넘긴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의 인권 신장과 민주주의 기틀을 다지고, 남북정상회담 및 교류확대와 외환위기 조기 탈출, 노벨평화상 수상 등 그의 빛나는 업적들을 살펴보면, 포부를 늦게 이룬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한, 그의 아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후광이 태어나고 3년이 지난 1925년은 일제(日帝)에 항거하는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이 공포(功布)되던 해였다. 민심이 흉흉하던 시절, 전국적으로 큰 수해까지 겹쳐 백성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지내야했다. 총독부(總督府)에서는 오천년의 찬란한 우리 문화역사를 왜곡, 폄훼 말살하려는 정책으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라는 친일어용단체를 설치했다.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해였다.
 
후광은 일곱 살 나던 해 초봄, 조선말 대유학자인 초암 김연이 설립한 지금의 덕봉강당인 초암서당의 학동이 되었다. 그때 배웠던 천자문과 동몽선습, 소학 등은 일찍부터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게 하는 입문서가 되었다. 한편, 일제가 금기시 했던, 조선의 역사책을 몰래 탐독하면서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어린시절을 보내면서 강제로 빼앗긴 농토를 되찾기 위해 마을에서 일어났던 농민항쟁을 지켜보며 일제 식민통치의 서러움을 체험했다. 그가 작문시간에 일제 식민통치를 비난하는 글을 지어 급장자리를 빼앗겼던 사건이 한 보기이다.
 
학창시절, 살아있는 우리의 얼을 가슴에 심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엿보인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역사였다고 하니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그때부터 자리를 잡지 않았나 싶다.
 
상업학교에 진학하여 역사 외에도 정치·경제, 문화·예술분야에까지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imf의 외환위기를 물려받은 5년의 짧은 임기동안에 이룬 높은 경제성장과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인터넷강국으로 올려놓은 시금석이 되었으리라.
 
1933년에 입학한 하의도 보통학교는 4년제였기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들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모두 처분하고 목포로 이주하였다. 자상하면서도 엄격하셨던 부모님의 정성어린 보살핌 속에 전학한 목포 북교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39년 목포상업학교(5년제)에 입학하여 1943년에 졸업했다.
 
상업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총독부저(總督府邸)(지금의 청와대)가 준공되었고, 세계 제 2차대전이 발발했다. 미래를 점칠 수 없던 불확실의 시대였다. 후광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지금의 청와대 건물이 완공되었다는 것이 묘한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2학년이던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한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실시되었고,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었다. 그들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의 혼을 말살하기위해 더욱 광분했고, 죄 없는 백성들의 활동까지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분노와 울분이 치미는 일제치하의 역사가 후광의 성장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학창시절에 꿈이었던 대학교수의 길을 접고 사업가를 거쳐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동기도 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상업학교 3학년이 되던 1941년, 일제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 유명한 태평양전쟁을 개시했다. 국제정세의 불안과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한 일제의 수탈도 더욱 심해져갔다. 이렇게 전쟁에 미쳐 날뛰던 일제의 탄압 속에 학교를 다니며 나라 잃은 설움을 피부로 느끼면서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무조건 항복하면서, 2차 세계대전도 막바지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1943년,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광은 일제의 강제징집을 피해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면서 사업가로서의 기반을 쌓아갔다. 그 후 해운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청년실업가가 되어 사업가로서 등장하게 된다.
 
사업가에서 정치가로
 
1945년(乙酉)은 36년 동안의 일제(日帝)의 탄압에서 해방된 해이다. 일제식민통치가 우리 민족에게 입힌 상처는 100년이 지나도 말끔히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훗날 한국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남북분단이 제일 큰 상처라 하겠다. 국호(國號)도, 주권(主權)도 없던 약소민족이 격어야 할 슬픈 역사였다.
 
아무튼 해방은 국가적인 경사만이 아니라, 후광 개인으로도 달콤한 신혼살림을 꾸리는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후광은 해방을 4개월 앞두고 차용애와 결혼하여 큰아들 홍일과 홍업,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김홍일은 지금도 의정활동을 하고 있으며 박정희의 유신군사독재시절과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시절의 후광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인물이다.
 
1945년은 일본제국주의가 군부독재의 파시즘체재를 구축하여 몇 번의 승전보를 울리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소화(昭和)20년이다. 백성은 하늘이라고 했던가. 시중에서는 일본이 패할 것이라는 소문이 진즉부터 나돌고 있었다. 전라도 해안지방의 어느 촌부가, 하늘에서 큰 황소 한마리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는데, 스님이 꿈 이야기를 듣고 소화(日帝)가 망할 것이라고 해몽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고 있었다.
 
성공한 청년사업가로서, 성실한 가장으로서 행복을 누리는 것도 잠깐, 신혼이나 다름없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후광은 사업상의 출장 때문에 서울에 있었다. 한강 다리가 끊겨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서울을 탈출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일 만에 목포에 도착했으나 곧 인민군 정치 보위부에 연행되어 형무소에서 그해 여름을 보냈다. 1950년 9월, 퇴각하는 인민군들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대략 200명가량의 사람들을 강당에 모이게 하고는 일차적으로 50명을 끌고 나갔다.
 
목포상업학교 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    © 편집부
후광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천우신조였는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트럭 운전사가 일부러 차를 고장내는 바람에 일단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해 탈출을 결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동생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형무소 담을 넘었다. 세상에 태어나 첫 번째 사선을 넘은 후광은 곧바로 해상 방위대에 참가하여 전남지구 부단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공산당의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는 것이 방위대의 임무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진행되던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은 영남과 호남지방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당시 부산에 있던 후광은 야당의 주요 인사들을 국제 공산당원으로 날조하여 강제 연행했던, 일명 ‘부산 정치 파동’을 겪으며 정치에 뜻을 두게 된다.
 
김성수 부통령의 사표제출에 이어 이승만, 함태영이 정·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국회는 제 1차 발췌개헌(拔萃改憲)안을 통과시켰다. 개헌안에 의해 지방의 도, 시, 읍, 면 단위까지 의원을 뽑았다. 후광의 정치 입문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던 혼탁한 사회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후광은 정치신인 시절, ‘과오를 개혁하려는 자들에게 순교의 횃불을 들어준다는 점에서 정치는 종교와 같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경구를 순수한 마음으로 신봉하였다. 누가 무엇을 얻기 위해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파괴하려 했단말인가.. 장기집권을 위해 행복한 가정의 파탄도 마다하지 않았던 자들은, 더 큰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으려면 국민과 피해자 앞에 나와 무릎꿇고 사죄를 해야 할 것이다.
 
정치를 시작하기 전, 후광은 튼실한 기업체 두 개를 운영하는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목포일보사를 인수하여 경영수완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화물선 15척 정도를 거느린 해운회사를 운영했다. 번창하는 사업 속에서 경영이란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실제 경험으로 깨우쳤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더 큰 경영’이라 할 수 있는 정치활동을 위해 정든 회사와 사원들을 떠났다.
 
후광이 처음으로 출마했던 선거는 1954년에 있었던 민의원선거였다. 기초를 세운다는 이립(而立)이 채 안된 나이에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자신이 있었다. 노동조합의 동향이 목포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던 그 시절, 평소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노조위원장과 간부들이 전면적인 지지를 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경찰에 연행되어 자유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고 각서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계의 문턱에서부터 음해와 공작에 시달림을 받아야했던 것이다.
 
1956년 10월에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해 5월 대통령에 출마했던 신익희 후보가 선거유세도중 이리(전북 익산)에서 급서(急逝)하고, 부통령에 선출된 장면 박사가 입당 권유를 해와 그에 따랐던 것이다. 장면 박사는 그 이듬해 여름 명동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을 때도 대부가 되어 주었다. 후광의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당시 한강백사장에서 있었던 신익희 후보 유세와, 1969년 삼선개헌을 앞두고 장충단공원에서 있었던 후광의 유세는 요즘시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학창시절 연극부에서 활동했던 후광이 그해 tv방송국(hlki)의 개국을 눈여겨보았다는 이야기는 그가 미디어산업을 비롯한 예술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당에 입당하자 당장 선거구가 문제였다. 고향 목포에는 같은 당 소속 의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를 하게 되었다. 당시 군민들은 압도적으로 야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서울 등 대도시에서 호남사람을 차별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이른바 ‘지역 감정’이란 것은 전국 어느 지역에도 없었다.
 
제4대 민의원 선거는 1958년 5월에 열렸다. 그러나 후광은 그 선거에 출마조차 못했다. 후보 등록조차 못하게 하는 자유당 정권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너무나 속이 상했던 후광은 군사지역인 그 곳 사단장을 찾아갔다.
 
사단장은 마침 부재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지만 이참에 이름이라도 알아두자 싶어 당번병에게 물어보았다. 사단장은 훗날 목숨까지 빼앗으려 했던 박정희 장군이었다. 만약 거기서 박정희를 만났더라면 그들은 함께 부정 선거에 대해 의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서로가 최대 정적이 돼야 했던 숙명도 조금은 그 양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1959년 6월 인제에서는 다시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부정에 대한 재판에서 민주당이 승소했기 때문이었다. 후광이 용공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것은 이때가 효시다. 자유당에서는 멀리 전라남도에서 그와 얼굴 한번 마주한 적도 없는 사람을 데려다, 그와 함께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도록 했다. 결국 후광은 낙선했고, 부정선거의 후유증이었는지 아내인 차용애와도 사별을 하게 된다.
 
4.19혁명으로 출범한 내각제정권의 장면 총리는 낙선한 후광을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선거운동과정에서 후광을 골탕 먹이고 당선됐던 상대 후보는 예전 3.15 선거부정에 연루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후광은 1961년 5월 14일, 다시 실시된 인제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부산정치파동이 동기가 되어 1952년에 정치입문을 했지만, 공식적인 입문은 국회등원을 하게 된 1961. 5. 14일의 보궐선거 승리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후광의 정치역정은 시작부터 불운했고 당선은 곧, 극심한 고난과 생사를 넘나드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당선 3일 만에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당선도 무효가 되면서 정치규제에 묶이는 비운을 맞게 된다.
 
야당 대통령후보가 되다
 
후광은 1961년 5월 14일에 치러진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뒤 당선증을 받고 14일과 15일, 지친 몸을 끌고 곳곳으로 당선 인사를 하러 다녔다. 이튿날 16일 이른 아침, 한 당원이 다급하게 찾아와 곤히 잠들어 있던 후광을 깨웠다.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후광은 일단, 당선 등록만은 해두려고 급히 서울로 올라왔지만 이미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로 인해 국회가 해산된 뒤였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후광에게 처음 선물한 당선무효라는 날벼락은,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총칼로 민주정부를 접수한 군인들은 정당 부패를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후광을 체포하여 형무소에 수감하였다. 그들은 당비 횡령과 용공 혐의를 걸어 무려 3개월간이나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점도 나오지 않자 형무소에서 내보냈다.
 
암담한 시절이었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1962년 5월, 정치적 동지이며 인생의 반려자인 이희호와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신혼생활 불과 열흘 만에 다시 ‘반혁명’ 죄목으로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구치소 생활을 하게 된다. 이희호가 결혼하여 맨 처음 한 일이 남편의 옥바라지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30년 가까이 이어졌던 정치공작과 고문, 납치와 연금 등 생사를 넘나드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군사쿠데타정권 시절이었던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고 이틀 뒤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말이 사임이지 군사쿠데타가 100%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마지막 사건이었다.
 
박정희가 민정(民政)불참선언에 이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잉크도 마르기 전에 말을 바꿔 군정(軍政)4년 연장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보면 장기집권을 위한 그의 계략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부터 짜여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3년 2월, 후광은 거의 2년 만에 해금이 되었다. 그해 1월1일을 기해 부산이 직할시(直轄市)로 승격되고, 10월에는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민주당에서는 따로 후보를 내지 않았다.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던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박정희와 윤보선 사이에서 야당 후보인 윤보선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후광은 야당 대변인으로서 박정희 후보를 공략할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듯, 쿠데타 후 박정희가 직접 제정한 국가재건특별조치법을 위반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의 군 퇴역과 공화당 입당 순서가 그 조치법에 걸리는 것이었다. 후광은 즉각 박정희 후보의 위반 사실을 국민 앞에 공개했고 당황한 공화당은 부랴부랴 특별 조치법을 개정하는 소란을 피웠다.
 
일설에 의하면 이 사건은 박정희가 후광을 평생 미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63년 11월, 6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후광은 목포에서 출마하여 많은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었고, 오로지 의정활동에만 전념했다. 그 효과는 이내 나타났다. 박정희에게 군인다운 순수함이 조금은 남아있던 시절, 비록 우회적인 방법으로나마 후광이 입안하고 제시했던 대안들을 알게 모르게 채택했던 것이다.
 
1964년 5월, 최두선 내각이 총사퇴하고 정일권이 새 총리에 임명됐다. 이어 한일회담이 시작되었고 회담을 반대하는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사회의 뜻있는 인사들과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데모 속에서 회담이 한참 계속되고 있을 때, 후광은 평생 처음 ‘사쿠라’라는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받았다.
 
무조건 반대하는 다른 의원들과는 달리 한일 국교 정상화는 하되, 굴욕적 부분과 불이익이 되는 부분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그렇지가 않았다. 회담 결사반대 입장의 야당이 선동에 치우치면서 마침내 6.3사태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 박정희와 여당은 아무런 실제적 간섭도 받지 않은 채 회담을 마무리해버렸다. 한·일간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갈등만 이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은 졸속으로 성사된 회담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흩어졌던 야당이 통합하여 신민당을 발족시킨 가운데 치러진 1967년 5월의 제 6대 대통령 선거와 6월의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차라리 전쟁이었다.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만은 반드시 낙선시켜야 한다며 선거운동 기간 동안, 두 번이나 목포에 내려와 지역개발 청사진을 제시했고 얼마 뒤에는 아예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전대미문의 한편의 코미디를 연출했던 것이다.
 
당연히 목포 선거구는 국내외 언론의 초점이 되어 기자들로 들끓었다. 여당은 개표 참관인들을 매수했고,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세 번의 정전 소동이 일어났다. 선거와 개표방해가 극성이었지만 후광은 결국 선거에서 승리했다.
 
1970년 봄, 신민당의 김영삼 원내총무는 야당 전체를 발칵 뒤집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이었던 것이다. 당시 유진오 총재는 중풍으로 쓰러지고, 부총재인 유진산 씨로는 도저히 다음 대통령 선거에 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40대 기수론은 당내의 기류를 타고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후광 역시 적극 찬동하였다.
 
야당의 끈질긴 투쟁과 반대 속에 1969년 10월에는 삼선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와우(臥牛)아파트 붕괴, 한강변 정인숙 여인피살사건, 전태열 열사 분신자살 등 큰 사건들이 터지면서 민심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회는 극십한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군사독재정권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폐해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70년 9월 29일 대통령 후보를 뽑는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후광이 정치를 시작한 이래 같은 야당에서 한솥밥을 먹어온 김영삼 씨와 첫 번째 큰 대결이었다.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 씨가 앞섰지만 2차 결선투표에서는 전체 880명의 대의원을 양분했다고 할 수 있는 33표라는 아주 근소한 표차로 역전승을 했다.
 
후광이 야당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처음 일성이 통일정책이었고 대통령 선거공약에서도 으뜸으로 자리했던 것을 보면, 대통령 재임5년 동안 제일 큰 업적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왔던 작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본보 제휴사: 신문고 ]
  • 도배방지 이미지